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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08 15:51 수정 : 2007.11.08 15:58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 불어터진 파스타는 공산당에 신고하자?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주방장의 악다구니에 시달리다
좌파정당 사무실의 공짜커피에 위로받던 나날들

유명한 파스타 이론서 <라 파스타>를 쓴 이탈리아의 마리아 템페스티니는 “이탈리아 요리의 위대한 배우는 파스타”라고 말했다. 사실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의 식탁과 이탈리아는 별반 다를 게 없다. 돼지 가공품도 비슷하고, 해물 요리도 비슷하다. 올리브기름을 많이 쓰는 것도, 다양한 치즈를 즐기는 것도 그게 그거다. 그러나 이들 나라와 이탈리아의 부엌이 다른 것은 파스타의 힘이다. 파스타 없는 이탈리아의 식탁은 상상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말해준다고나 할까.

타이밍은 냄새와 ‘깔’로 구별하다

당연히 이탈리아 식당의 주인공도 파스타다. 파스타라고 해서 스파게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스파게티 없는 식당이 더 많다. 집에서 대충 삶아 먹을 수 있는 ‘민중의 끼니’를 일부러 식당까지 와서 사먹는 경우는 드물기 마련이다. 링귀네(영화 ‘라타투이’의 주인공 이름은 바로 여기서 가져왔다), 탈리아텔레, 파파르델레, 라자네테, 가르가넬리, 리가토니 …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종류의 파스타가 뜨거운 솥단지 안에서 익는다.

주방이 솥단지처럼 후끈 달아오르는 저녁 때가 되면, 나는 바짝 긴장했다. 성질 나쁜 주방장이 국수가락을 휙휙 던지면서 신경질을 내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흥분하면 음식 재료를 던지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묘하게도 꼭 파스타였다. 버려도 비싸지 않고, 뺨이나 머리통에 맞아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 빼곤 다치지는 않기 때문이었을 게다.

파스타 솥에서 저마다 익어가는 파스타가 잘 익었는지 판단하는 법은 독특하다. 누군가는, 타일 붙인 벽에 던져 보거나(타일이 아니면 어떡하지?) 가운데를 잘라보아 하얀 심이 도드라지면 된다거나(맞는 말이지만 미적거리는 그 순간 팬이 날아와 머리통을 강타할 걸?), 타이머를 정확히 맞춰놓으라(아니, 동시에 아홉 개가 울려대면 뭐가 뭔지 어떻게 알지?)고 하는데, 다 틀린 말이다. 파스타가 익는 타이밍은 냄새와 ‘깔’로 구별한다. 파스타가 잘 익으면 마치 복숭아가 물렁하게 익어 향기를 뿜듯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아홉 개 파스타 구멍에 제각각 다른 파스타가 들어가 있으면 더 명확해진다. 곡물이 제대로 익어 침을 질질 흘리게 만드는 그 냄새! 그것이 바로 파스타가 다 삶아졌을 때의 ‘향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정확하지 않다. 바로 눈이야말로 파스타가 ‘프론토’(준비됐어) 상태임을 알려준다. ‘깔’이란 색깔이거나 때깔이다. 뜨거운 소금물을 빨아들여 적당히 통통해진 표면이 부풀어오르면 미끈한 자태로 변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가 ‘타이밍’이다. 팬으로 옮겨 뜨겁게 달구어진 올리브유를 뒤집어쓰고 달콤한 마늘향에 몸을 두어 번 굴리면 마침내 기막힌 시칠리아의 파스타가 탄생하게 된다.
2005년 찾아간 이탈리아 볼로냐 지방의 한 레스토랑에서 해물파스타를 주문했다.
“로베르토! 파스테 프론테?” 팬을 쥐고 있는 녀석들이 준비된 파스타를 던져달라는 악다구니를 열두어 번쯤 지르고 나면 하루가 마감한다. 그러면 내가 좀비처럼 몸을 구기고 숙소로 돌아가다 들르는 곳이 있다. 소설 ‘돈카밀로와 패포네’에 나오는 순진한 공산당 읍장이 마치 실존할 것 같은 정당 사무실이다. 말이 사무실이지, 경로당 같은 분위기인데 내가 이곳을 들르는 이유는 순전히 공짜 커피와 과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밤마다 꽃피던 광장문화 잊을 수 없네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잘사는 북부와 못사는 남부가 지독하게 눈을 서로 부라리는데, 총선 결과가 딱 그렇다, 북부의 ‘북부동맹’이라는 극우정당 녀석들은 “남부의 거지들과 함께 살 수 없다. 왜 우리 세금을 거두어 남부 거지들 밥값을 대주냐”고 노골적으로 유권자들을 선동한다. 그 결과 북부에서는 이런 극우 정당들이 다수당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부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 ‘패포네’들의 대활약으로 여전히 공산당과 좌파 정당이 득세하는 곳이다. 물론 그들이 공산당선언을 강요하거나 내밀하게 내게 세포로 암약할 것을 유도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두 다리 쭉 뻗고 사는 ‘다수당’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땅 시칠리아에서는 오른쪽에 있는 정당들이 점조직 세포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라는 얘기다.


레스토랑 주방의 분주한 모습
공산당 사무실에서, 아직도 런던월드컵의 영웅 ‘박두익’을 기억하는 정겨운 ‘빨갱이 노인네들’과 헤어짐의 의미로 두 뺨에 뽀뽀를 하고 거리고 나오면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밤 풍경이 벌어진다. 온 도시의 모든(정말 그렇다!) 청소년들이 떼로 몰려나와 밤마실을 즐기는 광경이다. 피시방도, 오락실도 없는 이 도시에서는 이같이 밤마다 광장 문화가 꽃핀다. 마리아와 마르코의 연애 또는 결별, 루카의 군대 입영 소식도 웹 게시판 대신 이런 광장에서 유통된다. 사람 사는 냄새가 있는 곳, 그래서 나는 지금도 시칠리아를 꿈꾼다. 물론, 파스타가 끓어 넘쳐 호되게 호통을 듣는 꿈도 있지만.

“로베르토! 께 까쪼 꼬또 뜨로뽀!”(빌어먹을 국수가 너무 익어버렸잖아) 고기가 웰던으로 바싹 익는 건 용서해도 파스타가 불어터지는 것은 절대 봐줄 수 없는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박찬일 뚜또베네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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