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1.08 15:35
수정 : 2007.11.08 16:03
|
제주올레는 마소가 함께 간다. 말미오름의 소가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
[매거진 Esc] 오름을 지나 모래사장과 풀밭 언덕을 오르며 말과 노니는 제주올레 걷기 여행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프랑스 생장피에 드 포르에서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가는 800㎞ 순례자의 길이다. 최근 한국 사람들에게도 이 길이 무척 유행이어서 도보 여행가뿐만 아니라 은퇴한 노부부, 쇼핑을 즐기는 ‘된장녀’까지 쳇바퀴 같은 일상을 박차고 평생 단 한 번 꿈꾸는 길이 되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는 세련된 이름은 사실 ‘산티아고 길’이라는 소박한 의미다. 카미노는 우리말로 ‘길’, 제주말로 ‘올레’ 정도 된다.
카미노 데 제주, 그러니까 우리 땅에도 ‘제주 올레’가 생겼다. 한국형 도보여행 코스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들이 갸륵하게도 사단법인 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를 만든 것. 지난 9월 제1 코스를 개발한 데 이어 이듬달 제2 코스를 발표했다. 지난 10월 말 제1 코스를 따라가 봤다.
|
광치기 해변에서 모래의 양감을 느끼며 걷는다.
|
소와 말이 낸 길을 따라 걷는다
⊙시흥초등학교~말미오름~알오름(3.8㎞)= 제주 올레 제1 코스는 성산읍 시흥리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한다. 시흥초등학교는 이 지역 출신 예비군들이 훈련 때마다 한 줄씩 잔디를 심어 아름답고 푸른 학교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난 두 번째 길을 택해 올라간다. 겹겹이 쌓인 돌담이 지평선을 이룬 아름다운 길이다. 큰바위 얼굴을 한 말머리오름이 거대하게 솟아 있다. 30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에 ‘제주 올레길 차자와주엉 하영 고맙수다-시흥리 마음회’라는 펼침막이 반긴다. 여기서 산길을 15분 오르면 말미오름 능선이다. 바람이 세지고, 가을억새가 춤을 춘다.
능선 오른쪽 길을 따라 걷는데, 토실한 암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거느리고 길을 막는다. 가까이 다가가도 눈을 부릅뜨고 길을 비켜주지 않는다. 반대쪽 억새밭이나 보고 갈까 해서 발길을 돌렸다. 목장 주인 강문주(54)씨가 사람이 반갑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건다.
“예전에는 이곳이 다 풀밭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없었는데. 그런데 박정희가 새마을운동 할 적에 밀가루 주고 나무 심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된 거예요.”
|
바닷가에선 오징어가 가을 햇볕과 바람을 맞고 마른다.
|
과연 말미오름 안쪽으로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랐다. 소나무가 없었더라면 부드럽게 파인 굼부리(분화구)였을 것이다. 군데군데 작은 길이 나 있는데, 이게 다 소와 말이 낸 길이란다. 강씨에게 물어봤다. 목장 한가운데로 제주올레가 났는데, 사유지인데 괜찮으냐고. 강씨는 애써 사투리를 숨기며 말했다. “길은 사람 발길을 타야 좋지요. 목장 드나들 때 문만 잘 닫고 가면 돼요.”
|
가을 제주의 볼거리는 억새다. 어느 곳이나 피어 하늘거린다.
|
말미오름 정상(해발 130m)에서 굼부리로 내려간다. 격자로 배치된 산담(돌담으로 두른 무덤)과 무밭을 돌아가면 다시 목장 입구가 나온다. 목장의 드넓은 평원을 올라간다. 다시 정상. 알오름이다. 해발 145.9m. 장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뒤쪽으로는 버섯처럼 솟아오른 오름들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 앞쪽으로는 장쾌한 제주 서부 바다다. 소처럼 길게 드러누운 우도와 전함처럼 버티고 선 성산일출봉. 종달리, 시흥리, 섭지코지 등 대략 오늘의 코스가 한눈에 잡힌다.
|
섭지코지의 방두포 등대.
|
⊙알오름~종달리~해안도로~성산일출봉~수마포 해안(10.2㎞)= ‘안티 공구리’를 표방하는 제주 올레도 이 구간에서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피하진 못했다. 속도만 중시한 우리 길의 씁쓸한 현주소다. 종달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따라온다. 조가비 박물관 맞은편 2층에 시흥리 해녀의 집이 있다. 조개죽 맛이 일품이다. 성산읍으로 진입한다.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성산일출봉을 둘러봐도 좋고 곧장 가도 좋다. 대신 수마포 가는 올레는 빼먹지 말 것. 제주도를 몇 번 다녀 온 사람도 이 산책길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데, 일출봉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지점이다. 일출봉 남쪽 절벽에 거대한 구멍들이 뚫려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판 동굴이다. 제주도엔 이런 ‘전시동굴’이 여럿이다.
⊙수마포 해안~광치기 해안~섭지코지(3.6㎞)= 본격적인 바다 산책길이다. 검은 모래와 녹색 해초를 외투 삼은 갯바위가 어우러진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한다. 두 길이 있다. 모래의 양감이 전해지는 모래사장 길, 그리고 흙길의 탄력이 느껴지는 풀밭 언덕길.
그동안 제주 여행의 대세는 렌터카였다. 2~3년 전부터 스쿠터도 돌아다닌다. 이렇게 빠르게 달리면 하룻만에도 제주도를 요점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이라기보다는 관광지를 ‘검사’한다는 생각이 든다. ‘주차비는 왜 계속 내야 하는 거야’, ‘음 … 용두암은 용이 아니라 바둑이처럼 생겼군’. 내려서 찍고 타고, 내려서 찍고 타고. 내연기관에 의지하는 여행은 시각적 체험이 주를 이룬다.
|
최근 섭지코지 주변 일부 땅이 사유지가 돼 주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
렌터카와 스쿠터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
하지만 다리에 몸을 맡기면 제주의 바람이 느껴진다. 바람에 춤추는 억새, 귀청을 때리는 먹먹한 바람소리, 바람이 실어 나른 갯내음,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의 질감. 걸어서 여행하면 인간의 전 감각이 활용되고 개발된다.
섭지코지를 향해 언덕길을 걷는데, 풀을 뜯던 말이 반가운 듯 쫓아온다. 한참을 말과 놀았다. 제주 올레를 바람이 친구가 되고 소와 말이 다가와 말을 건다. 사실 제주 올레의 상당 부분이 ‘우마차로’다.
성산(제주)=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알오름 주변에선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는다.
|
|
외투와 현금 꼭 준비
제주 올레 걸을 땐 다음에 유의하면 좋다.
①편한 운동화나 등산화, 두툼한 외투를 준비하라. 때로 제주의 바람은 세차다.
②약간의 현금을 지닐 것. 시흥리·종달리의 구멍가게에서는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
③도로를 걸을 때는 차선 방향 반대편에서 걷는 게 좋다. 자동차를 등지고 걸으면 위험 상황에서 대피하기 어렵다.
④목장을 드나들 때는 꼭 문을 닫으라. 말미오름과 알오름 구간 네 군데에서 목장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자물쇠가 없으므로 밖에서 열고 들어가 잠근다.
|
|
|
|
제주 올레 여행쪽지
1코스 17.6Km, 부담되면 절반만
|
제주 성산 지도
|
⊙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제주~서귀포 동회선 일주도로를 타고 시흥리에서 내리면 제주 올레 제1 코스의 시발점인 시흥초등학교가 있다. 시외버스 터미널 첫차 새벽 5시40분, 막차 저녁 8시. 1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은 국제공항에서 멀지 않다. 시내버스 300번을 타거나 택시를 탄다. 15~20분 걸린다.
⊙ 제주 올레 1코스의 총 구간 거리는 17.6㎞. 시흥초등학교에서 종달리까지는 오름과 억새길이고, 종달리에서 수마포까지는 해안도로 길, 수마포에서 섭지코지까지는 모래사장이나 흙길이다. 시간당 3㎞를 계산하면 여섯 시간이 걸린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성산에서 점심을 먹고 해질녘 쯤에 섭지코지에 도착하게 된다.
⊙ 갈림길이 잦은 탓에 길 잃을 염려가 있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제주 올레는 동네 둔덕과 밭, 마을 사이로 난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 홈페이지(jejuolle.org, 064-763-0852)에 가서 그림지도를 내려받는다. 1만원을 주고 제주 올레 연간 회원에 가입하면, 들고 다니기 편한 그림지도 책자를 보내준다. 제주 올레가 ‘올레 사인’을 코스 곳곳에 해놓았다. 파란색 화살표나 파란색 리본을 따른다.
⊙ 긴 거리가 부담스럽다면 1코스를 완주할 필요는 없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주민들은 두 오름을 합쳐 두산봉이라고 부른다)을 잇는 구간이나 광치기 해변에서 섭지코스까지의 구간만 걸으면 반나절로도 충분하다.
⊙ 제주 올레 2코스는 서귀포 근처 해안을 걷는 길이다. 쇠소깎에서 시작해 보목리, 정방폭포, 외돌개, 범섬을 잇는다. 거리는 7~8㎞, 3~4시간 정도 걸린다. 이 역시 제주 올레 홈페이지에 그림지도가 실렸다. 아직 책자는 발간되지 않았다.
남종영 기자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