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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하면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떠오른다. 스파이는 마지막 순간 베를린 장벽을 걸터앉아 동쪽으로 뛰어내릴까 서쪽으로 뛰어내릴까 고민한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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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나의 도시이야기 CBS 정혜윤 피디의 베를린
어찌된 이유인지 베를린 하면 나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나 손기정과 히틀러와 괴벨스가 동시에 떠오르는 베를린 올림픽보다도 존 르 카레의 소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의 맨 마지막 장면이 더 선명하게 생각난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소설의 맨 마지막 순간에 베를린 장벽에 걸터앉아 자신의 운명을 걸고 동쪽으로 뛰어내릴까 서쪽으로 뛰어내릴까 고민한다. 베를린 장벽이 사라진 수년 뒤 2003년 가을, 정확히 11월9일(그날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에 내가 베를린을 찾았을 때는 비정한 스파이 대신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구경하러 관광버스를 타고 독일 전역에서 몰려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즐비했다. 토끼고기를 파는 레스토랑에서 팔짱을 끼고 그들을 내다보니 베를린 도착 첫날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어떤 추위의 느낌을 알 것도 같았다. 베를린의 국제공항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질질 끌고 도착했을 때, 베를린의 첫 느낌은 오싹할 정도의 한기였다. 그만큼 춥고 어두운 밤이었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공항 유리문 앞에서 여행가방에 걸터앉아 한참 어둠을 응시하다 보니 ‘여행자여, 당신은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입니다. 추위는 피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우리 모두 어차피 추운 나라에서 온 것 아닌가?’ 나는 이 말을 크리스마스 파티용으로 사놨던 반짝이 아이라이너로 공항 창문에 조그맣게 써 놓고 공항을 떠났다. 내가 묵던 호텔은 옛 동독의 아파트를 개조해 만든 곳이었는데 밤이 되면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어서 나는 처음에는 라디에이터 소리를 향해 돌아눕다가 더 추워지면 일어나 라디에이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해 2003년의 베를린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퀸의 음악과 그리고 아침 지하철역 풍경이다. 아침을 먹으러 호텔 일층 식당에 내려가 빵에 치즈를 한 장 끼워놓고 씹다 보면 매일 나오는 음악은 퀸의 것이었는데, 그건 시디플레이어가 아니라 공중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젊은 남자 아나운서가 뭐라고 말을 하든 그 다음 음악은 퀸의 ‘Don’t stop me now’와 ‘We are the champions’였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퀸의 음악을 듣다가 지하철역에 나가면 가죽옷을 입은 남녀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며 일제히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대는 걸 볼 수 있었다. 슈프레강가 페르가몬 박물관, 서베를린의 쿠담지역, 포츠담 광장 기차역의 가게들 어디에서도 아직 유로 화폐를 자유롭게 쓰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주 가끔 그때 일렬로 늘어서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의 아침부터 고독하고 피곤한 표정을 생각한다. 역사가 한바퀴 도는 동안 그 무대가 되는 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한기를 견뎌내면서 자기만의 장벽에 걸터앉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CBS 정혜윤 피디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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