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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19 18:13 수정 : 2007.12.19 18:13

하이라이트 관람 불가

[매거진 Esc] 김중혁의 액션시대

할 일은 많은데 어쩐지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까, 봐야 할 것은 많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없으니까, 압축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일요일 낮 영화정보 프로그램에서는 2시간짜리 영화를 (우와, 놀랍게도) 5분으로 압축해 버리고, 어떤 출판사에서는 명작소설들을 (말이 좋아) 논술 교재용 축약본으로 압축하기도 한다. 가끔 압축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5분짜리 영화 하이라이트를 보고 나면 ‘아, 이 영화는 안 봐도 되겠군’ 싶어지기도 하고, 명작소설을 간략한 줄거리로 설명해 놓은 걸 보면 ‘겨우 이런 이야기였나? 괜히 시간과 돈만 낭비할 뻔했군’ 다행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다. 모두 다 함정이다. 압축이란, 한번 발을 들여놓고 나면 도무지 헤어나기 힘든 중독성 함정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감동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 하이라이트 디브이디를 볼 때가 있다. 그 디브이디에는 대회의 모든 골이 영상으로 담겼다. 멋지다. 시원한 골을 보면 가슴이 후련하다. 예술적인 골도 많았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하다. 골 장면 모음집에는 맥락이 없다. 저 선수가 왜 저렇게 기뻐하는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수비수 A는 어쩌다 저런 어이없는 골을 먹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수비수 A의 사정은 이렇다. 그는 거친 선수다. 태클도 과감하고 몸싸움도 즐긴다. 그는 공격수 B를 전담마크하고 있었다. 경기 내내 찰거머리처럼 B에게 달라붙었다. B는 짜증이 났지만 열심히 뛰었다. 단 한순간을 노렸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B에게 공이 갈 때면 어김없이 A가 밀착마크를 했다. A는 심판이 보지 않는 틈을 타 B의 종아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오른손으로 경기복을 잡아채기도 했다. B는 심판에게 항의했지만 심판은 보지 못했다.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경기가 끝날 때쯤 B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A는 안심했다. 경기는 비겼지만 자신의 역할은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B가 공을 향해 전략 질주했다. 뒤늦게 A가 따라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몸은 이미 긴장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다리를 절룩거린 것은 B의 작전이었다. B는 골을 넣었고, 곧 경기가 끝났다.


김중혁의 액션시대
지루한 경기였다. 한 골밖에 나지 않았고 멋진 골도 아니었다. 미드필드에서의 공방전이 잦았다. 골대 안으로 들어간 슛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수비수 A와 공격수 B가 펼친 명승부였다. 어떤 경기는 감독과 감독의 머리 싸움이 빛났던 명승부였고, 또 어떤 경기는 후반전에 투입된 미드필더 한 명이 경기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명승부였다. 그런 건 절대 하이라이트로 볼 수 없다. 그건 경기를 다 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지루한 경기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압축해서 시간을 버는 것보다는 지루하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낫지 않은가. 뭘 그리 압축하는지 모르겠다. 압축된 걸 보고 남는 시간에 뭐 특별한 걸 하지도 않으면서.

김중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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