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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16 18:03 수정 : 2008.01.20 10:13

만두피 만들다가 피가 거꾸로 솟을라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중노동에 골병 든 이탈리아 요리사들을 두 배로 골탕 먹이는 ‘얄미운 라비올리’

예전부터 이탈리아는 노동자가 살 만한 나라였다. 나라를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파시즘에 대한 나쁜 기억이 노동자 중심의 좌파 정권을 지탱해 줬다. 일년에 한 달은 바캉스고, 점심시간은 주야장천 3시간을 보장받았다.(물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강타한 요즘에야 언감생심이지만.) 휴가철에는 마피아도 안전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검사와 형사도 휴가를 가야 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요리사’ 이면에 숨겨진 노동 조건

그러나 식당 노동자만은 예외다. 남들 다 노는 휴가철과 주말이 더 바쁘다. 주당 70시간 근무가 예사고, 온종일 식당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초과근무 수당도 없다. 오직 ‘그랑 셰프’(위대한 요리사)가 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일 뿐이다. 웬만한 연예인 뺨치는 인기에 높은 수입이 보장되고, 대통령이나 총리와도 맞먹을 수 있는 최고 요리사의 자리를 꿈꾼다.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이 자신이 주최한 만찬장에 주방장을 모시고, 감사와 존경을 바치는 광경을 떠올려 봤는가. 그야말로 스파게티 불어 터지는 소리다. 그러나 유럽에서 위대한 요리사를 대하는 태도는 상상 이상이다. 텔레비전에서 총리와 요리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수작을 나누는 장면을 보는 게 어렵지 않다. 어떤 쇼 프로그램에서는 ‘비싸니’라는 스타 요리사(이름이 재미있게도 정말 ‘Vissani’다)를 파파라치처럼 따라붙기도 했다.

자명한 얘기지만, 모든 요리사가 그랑 셰프가 될 수는 없다. 고단한 일상과 박봉만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래서인지 흡연율이 가장 높은 직업 중에 요리사가 속한다. 정작 담배를 멀리해야 할 직업인데도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대마초(이미 청소년들의 국민 기호품이 되어버린) 흡연도 아주 흔하다. 내가 일했던 ‘파토리아 델레 토리’의 부주방장 페페는 물론이고, 와인 담당인 루카도 대마초를 입에 달고 살았다. 단속은 없냐고? 명목상 불법이지만, 유럽에서 대마초는 위험물질이 아닌 세상이 되어버렸다. 경찰 앞에서 대놓고 피우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즐기고 살 만한 형편이라고나 할까.


대마초를 피워댈 만큼, 안 그래도 힘든 주방 노동에 불을 지르는 일이 있다. 바로 만두 빚기다. 알다시피 이탈리아에는 한국의 만두처럼 생긴 라비올리가 있다. 한국 만두와 다른 점은 속에 채우는 소보다 피를 더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만두, 즉 라비올리는 껍질의 ‘순도’와 기술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하긴 한국의 만두도 피를 얼마나 잘 반죽하고 빚느냐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지지 않던가. 손으로 반죽한 피와 기계로 찍어낸 인스턴트 피는 만두의 품질을 가를 정도로 결정적인 맛의 차이를 불러온다.

얼굴이 비칠 듯 얇은 피 밀려면 죽을 맛

라비올리를 잘 만들려면 역시 피를 잘 빚어야 한다. 달걀을 넣어 노란색으로 반죽한 밀가루 덩어리를 아주 얇게 펴는데, 마치 얼굴이 비칠 것처럼 반투명하게 밀어야 한다. 기계를 쓰기도 하지만, 역시 기다란 밀방망이가 제격이다. 털이 숭숭한 우람한 팔뚝을 선보이며 길이가 1미터가 넘는 밀방망이를 유연하게 다루는 모습에서는 장인의 경지가 느껴진다.

막 삶아낸 라비올리 모습. 라비올리는 요리사의 솜씨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라비올리는 원래 이탈리아 중북부인 에밀리아 지방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전파된 음식이라고 한다.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사는 볼로냐와 타계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고향인 모데나가 이 지방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라비올리는 모양과 맛도 다양하다. 동그랗거나 반달 모양의 만두는 라비올리(평양 왕만두처럼 훨씬 크게 만들면 ‘라비올로니’라고 한다), 개성식으로 반달 모양의 만두 끝을 붙여 둥글게 말아 만든 것은 토르텔리, 토르텔리보다 더 작게 만든 것은 토르텔리니라고 한다. 소는 무엇으로든 만든다. 그래서 쓰다 남은 재료는 모두 라비올리 소로 처리되기도 한다. 혹시 당신이 어떤 이탈리아 식당에서 ‘여러 가지 재료를 넣은 라비올리’라는 메뉴를 발견했다면 그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는 내게 묻지 마시라.

어쨌든 라비올리는 이탈리아 식당의 인기 메뉴다. 손님들이란 원래 요리사들이 골탕 먹게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시키게 되어 있는 족속들이다. 일주일은 넉넉히 쓸 것처럼 잔뜩 빚어 놓은 라비올리가 이틀이면 소진되어 밤새 반죽을 밀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부주방장이자 대마초꾼 페페가 일찍이 명명컨대 ‘엿 같은 라비올리’가 된 것이 아니던가.

“내가 이 걸레 같은 라비올리나 빚으려고 요리사가 된 줄 알아? 이런 건 일 없는 할머니들 일이라고. 저기 북쪽, 그래 에밀리아, 그 동네 뚱뚱한 할머니들이 하는 일이라고, 젠장.” 어쨌든 영업시간에 라비올리 주문이 들어오면 펄펄 끓는 소금물에 크기에 따라 세 개든, 다섯 개든(대개 홀수로 나가는데 이건 동서양이 비슷하다) 라비올리를 던져 넣는다. 라비올리가 잘 익었는지 판단하는 법은 딱 두 가지다. 하도 파스타를 삶아대어 걸쭉해진 소금물이 마치 마귀할멈의 탕약처럼 거품을 부글부글 뿜어내는 사이로 라비올리가 둥둥 떠오르면 일단 익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냉동해 두었던 라비올리라면 아직 속은 차갑고 냉정한 상태로 토라져 있을 게 분명하다. 이런 상태로 손님에게 나갔다간 주방장 말대로 ‘차가운 디저트를 너무 일찍 내보내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하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니 떠오른 라비올리가 충분히 사랑받도록 거품 사이로 3~4분 방치해 두는 센스가 필요하다. 라비올리는 뜨겁게 차오른 열기를 콧김처럼 피 밖으로 뿜어내면서 파스타 삶는 솥을 돌아다닌다. 이때 낚시하듯 체로 슬쩍 건져내면 되는 일이다.

그 식당의 솜씨를 소 까발리듯 보여준다네

프로라면 라비올리가 떠오른 뒤 색깔로 판단한다. 라비올리 귀가 쭈글쭈글하면서 야들야들하게 바뀌고, 노란색의 반죽 표면이 투명하게 바뀌는 타이밍이 있다. 아아, 아직 서두르지 마시라. 그러고도 1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돌반지처럼 싱싱한 황금색이 아니라, 빛바랜 할머니 반지 같은 희미한 금색으로 빛날 때가 비로소 라비올리가 다 익은 시점이다. 이제 건져내어 지글거리며 버터가 익어가는 팬에 던지면 딱 두 번 휘저어 접시에 담을 수 있다. 잊지 말 것은 세이지 잎을 하나 따서 버터에 향을 우려내 주어야 한다. 입술가를 번질번질하게 만드는 뜨겁고 고소한 버터에 매혹적인 세이지 향! 포크와 나이프로 라비올리를 가르면 훅 김을 뿜어내며 속을 토해 놓는다. 대강 삶아 내도 별 차이가 없는 인스턴트 스파게티 따위야 누가 하든 별 차이가 없지만, 라비올리는 거짓말을 못한다. 그 식당의 솜씨를 소 까발리듯 보여주는 것이다. 이탈리아 식당에 <미슐랭 가이드>가 별을 줄 때는 이처럼 고약한 관점으로, 요리사를 골탕 먹이는 복잡한 라비올리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를 기준으로 삼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페페의 말대로 ‘엿 같은 라비올리’인지도 모른다.

박찬일 뚜또베네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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