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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23 23:34 수정 : 2008.01.27 10:41

육십령이 멀지 않은 함양군 서하면 길다방 삼거리.

[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1
잠시 반짝이는 거리의 눈빛에 위안받으며 부릉부릉 차 마시러 다녀보자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스쿠터에 봇짐 하나 싣고 전국의 다방을 여행합니다. “다방에 관한 다큐멘터리적 접근은 아니고 다만 한 여행자가 길 위에서 보낸 사적인 기록”이라는 게 스쿠터에 몸을 실은 유성용씨의 말입니다. 여행에서 만나는 의도 밖의 풍경을 기록하는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은 격주 연재됩니다.

교차로 신호등에 걸리면 이륜차들이 맨앞에 늘어선다. 뒤따라 오다가도 차와 차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온다. 피자 배달, 치킨 배달 철가방, 그리고 각종 퀵서비스. 그 중 철가방은 한 손으로 운전하니까 이쪽에서는 공인된 최고수다.

교차로에서 느끼는 그 미묘한 연대감

골목길에 마주 오는 차가 있고 스쿠터 한 대 간신히 빠져나갈 공간밖에 없을 때도 멈추지 않는다. 철가방 든 손을 차 위로 뿔껑 들어올려서는 쌩! 지나간다. 그 ‘포스’를 견줄 만한 스쿠터 운전자는 없다. 신호에 걸려 교차로에 멈춰서면 스쿠터들은 시동이 꺼지지 않게 틈틈이 액셀을 당겨줘야 한다. 그 와중에 귀찮게 짓누르는 헬멧의 무게 너머로 서로들 아주 잠깐 눈빛을 나누기도 하는데, 이것은 왠지 사랑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병아리 조심해라,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사랑은 이미 세속화되는 도심의 한가운데서 자꾸만 뻥과자처럼 부풀어 올라 아무래도 너무 많은 걸 감당하고 있지 않은가. 월화수목금 남의 골을 열심히 빼먹으면서도, 때때로 진지해져서 연애하고 그 절망 속을 애틋하게 반추한들 그것은 다만 이 세속을 견디는 그 어떤 증상만 같다. 그보다야 ‘나는 살아 있다’는 눈빛만 나누고, 제 생계의 길 위를 부릉! 달려가는 이륜생활자들의 풍경은 왠지 코끝 찡한 데가 있다. 교차로에서 느끼는 그 어떤 미묘한 연대감, 그것이 비록 연대의 내용이랄 것도 없는 막연한 연대감일 뿐일지라도, 그래도 째쟁이 양아치 스쿠터 패셔니스트들과는 나눌 수 없는 무엇이었다. 때때로 마주치는 뭐 같은 운전자의 횡포 앞에서 네 바퀴 운전자들은 차안에 편하게 앉아서 쌍욕을 해대지만, 우리는 다만 제 각각 온몸으로 익힌 신기의 기술로 그 위험을 삽시간에 피하고는 과묵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릴 뿐이다. 초짜 시절에는 교차로에 멈춰 설 때마다 나는 그 눈빛을 열심으로 시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다만 이런 정도의 눈빛을 돌려받았을 뿐이다.

“이봐 병아리, 운전 조심해라. 골로 가는 수가 있다!”

몇 달 스쿠터를 타고 전국 다방기행을 떠날 거라고 하자, 친구들은 아주 재밌겠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 물었다. 왜 다방이냐고. 다방 아가씨들 오봉(쟁반의 일본말로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을 이르는 속어)에 패티시 있냐고. 나도 이유를 모른다. 다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도시의 여자라면 이미 예쁘기는 틀린 거 아니냐고. 사람들은 나를 언제부턴가 ‘여행생활자’라고 부른다. 생활 속에서도 세상은 막막하고 내가 나를 이끌어 가는 이유들이 아득할 터인데, 하물며 길 위에서 여행이 고작 생활이 되어버린 사람이 흘려보내는 인생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 와중에 가끔 전국 여기저기 다방이 있어서 나는 다방을 가는 거다. 새를 보고 허공의 깊이를 가늠하듯, 전국 여기저기 이제는 사라져가는 다방이 있어서 나는 이 여행의 아무런 성과 없는 허허로움을 위로받을 것이다. 여름의 끝자락에 출발해서 미칠 듯한 단풍 속을 달리고, 펑펑 눈 내리는 겨울을 기어다녔다. 서울서 살면서 때때로 전국의 다방들을 찾아다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사실 다방이야 그저 허방한 이유일 뿐, 이 세상에 따로 그 속사정을 알아봐야 할 다방이랄 게 뭐가 있겠는가. 길 위에서 내 의도를 조금이나마 줄이고 엑셀을 힘껏 당기다 보면, 그 사이 또 봄이 오고 꽃은 피거나 할 것이다.

기름이 떨어지고 보일러가 멈출 때쯤…

떠나오면서 커다란 카메라를 팔아 버리고 작은 카메라를 하나 장만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한 것으로. 그리고 몇몇 옷가지를 더블백에 챙겨 넣었다. 집은 깨끗이 청소했다. 이불을 빨아 고실고실하게 말려두고, 신발들은 신문지를 말아넣고 방안에 가지런히 정렬해 두었다. 늘 약정기간을 채우지 못하는 인터넷을 또다시 끊고, 일기들을 책장 깊숙이 숨겨두고, 쌓인 편지들을 마당에 나가 태웠다. 보일러는 겨울에 얼어터지지 않도록 외출에 맞춰놓고 나섰다. 얼마 남지 않은 기름이 다 떨어지면 보일러는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저 남도 땅 어디쯤을 내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집을 나서면서 내 이름자가 박힌 문패를 보고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그러니까 나는 마치 나를 두고 여행을 떠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스쿠터 여행은 시작 되었다.

글·사진 유성용/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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