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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31 14:04 수정 : 2008.02.03 10:34

유년 시절을 보낸 윈도 베이커리가 살아 남아 있다면 행운이다. 역사 깊은 윈도 베이커리는 ‘문화재’와 같은 존재이다. 탁기형 기자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김천 뉴욕제과집 아들 소설가 김연수가 말하는 나의 고향, 나의 빵집

내가 태어났을 때, 거기에 뉴욕제과점이 있었다. 빵집 아들로서 내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는 그 빵집이 제일 행복했던 시기와 겹친다. 그 시기는 대략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죽고 난 다음부터 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의 14년 정도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니까 나의 16년 정규교육 과정과 거의 일치했다는 점에서, 그건 행운이었다.

마이카 붐, 역전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특히 80년대 초반은 경이로운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명절이면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이 모두 기차를 타고 고향을 찾아왔다. 역에 기차가 서면 그 좁은 기차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역전으로 쏟아져 나왔다. 역전으로 나온 사람들은 고향집에 선물로 가져갈 백화수복이나 치약세트나 종합선물세트를 사게 마련이었다. 그들이 들고 가는 선물 목록에는 제과점의 롤케이크, 하지만 우리끼리 부를 때는 ‘로루’도 있었다.

로루는 한 상자에 두 개가 들어갔는데, 둘 모두 들어가는 걸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개는 이런저런 빵들과 함께 로루 하나를 추가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명절이면 로루를 잔뜩 만들어 쌓아놓고 팔았다. 명절에는 특별수송시간이므로 밤새 귀성열차가 도착한다. 뉴욕제과점의 폐점 시간은 밤 12시께였지만, 명절만은 밤새 영업을 한다. 이삼일 정도, 주로 아버지와 우리들이. 그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걸 모른다. 병도 나지 않는다. 자영업자들의 건강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곧 마이카 붐이 찾아왔다. 귀성열차는 예전에 비해서 한산해지면서, 대신에 전국의 고속도로가 마비되는 시절, 역전에 자리 잡았다는, 뉴욕제과점의 프리미엄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대신에 제과점의 이용 연령은 크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제과점은 어른들의 공간, 일종의 라운지였다. 많은 어른들이, 선을 보는 사람, 탁발에 나선 스님, 바짓단에 풀이 묻은 채로 남쪽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 양복 차림의 이방인, 문신투성이의 몸뚱어리를 보이며 싸움을 벌이다가 역전파출소로 끌려가는 남자 등이 구석구석 앉아서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이 되자, 고등학생들이 미팅을 하러, 친구 생일 선물로 케이크를 사러, 입시철에 찹쌀떡을 사러,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사러 모여들었다. 뉴욕제과점의 4대 대목은 설, 복중, 추석, 크리스마스다. 주종목은 롤케이크, 빙수, 케이크다. 마이카 붐으로 설과 추석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새롭게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입시철이 새로운 대목으로 떠올랐다. 한번의 변화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매출은 줄어들지 않았다.


결정적인 변화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시작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같은 물품들을 팔았던 작은 가게들로 가득했다. 왕자고무신, 정시당, 남경반점, 평화철물점, 미영라사 등의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주장하면서부터(그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런 가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대기업의 대리점이나 할인마트가 차지했다.

세계화와 작은 가게들의 종말

제과점도 마찬가지였다. 파리크라상과 크라운베이커리와 파리바게트가 생기면서 뉴욕제과점과 그 경쟁 빵집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쟁력 강화라는 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특히 한쪽에 대기업이 있다면 그건 당장 문을 닫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무리 역사가 오래됐어도 이제 경쟁력이 없는 뭔가, 그게 빵집이든 문화든 사람이든 살려두는 걸 불공정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살고 있다.

다 인정한다. 대기업의 빵들은 뉴욕제과점의 빵들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살았던 세계가 조금 더 지속됐으면 싶었다. 내 아이와 고향을 걸어가며 그 가게들의 유래와 약사를 소개할 수 있었으면 싶었다. 내가 알던 세계, 나를 키웠던 세계는 내 예상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빵집만 놓고 보자면, 이제 우리는 전국 어디를 가나 똑같은 맛의 빵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이로써 세상은 공정해졌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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