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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31 15:38 수정 : 2008.02.09 14:40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매거진 Esc]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촌뜨기 주방장 주세페가 기발한 요리로 로마의 방송 프로그램에 데뷔하기까지

“저, 저 … 다리좀 봐. 오, 감베!”

시뇨라 마리아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스튜디오를 바라보았다. 그가 남편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여성 진행자를 내게 가리켰다. 정말 대단한 ‘감베’(gambe·이탈리아말로 다리)가 아닐 수 없었다. 모차렐라 치즈처럼 하얗고 탱탱한 다리가 짧은 치마 사이로 길게 뻗어 있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꼬고 낮은 소파에 앉았으니, 주세페가 연신 ‘엔지’를 내는 건 그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뇨라 마리아, 이 불쌍한 마리아 부인은 높은 조명 아래서 진땀을 흘리는 남편을 부창부수 하느라 그랬는지 보기에도 딱하게 함께 땀을 뻘뻘 흘렸다. 그건 그 허연 허벅지 ‘감베’ 때문에 생긴 질투인지, 불안한 남편의 인터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여성 앵커의 허연 ‘감베’ 때문에…


주세페는 소파에 앉아 여성 진행자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눈길을 어디에 둘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연신 ‘컷’ 사인이 들리고, 이 촌뜨기 주방장과의 인터뷰는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한국방송>(KBS)에 해당될 국영방송 <라이>(RAI)에서 내가 일하는 시칠리아 식당의 주방장 주세페를 인터뷰하자고 연락이 온 건 놀라운 일이었다. 주세페는 라이의 요리 프로그램에 초청받은 것이었다. 요리사가 텔레비전에 약한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로베르토! 전화가 왔어, 전화가!” 양파를 써느라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는 내게 주세페가 호들갑스럽게 달려오며 뱉은 말이었다. 그는 마치 부주방장 뻬뻬와 싸울 때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싸울 때 말고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세페는 새벽부터 자기 아내 마리아와 로마행 비행기를 탔다. 고향 마을 시칠리아에서 기차를 타면 열 시간 넘게 걸리는 여정이 부담스러웠던 까닭이었다. 부산에서 신의주만큼 먼 거리여서 기차는 역시 무리였다.

주세페가 라이 요리 프로그램에 불려나온 것은 초콜릿을 입힌 토끼고기와 만두요리가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미식 잡지에 실린 이 요리를 보고 로마 방송사에서 관심을 가졌고, 그는 냉큼 비행기에 올라 로마의 스튜디오까지 내달렸다.

시칠리아는 오래 전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도 이 지역은 스페인풍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데, 초콜릿도 아주 독특하게 잘 다뤘다. 초콜릿은 알다시피 유카탄 반도에서 시작된 토속 음식재료가 스페인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던 탓에, 스페인은 초콜릿의 종주국 행세를 하고도 남았다. 시칠리아 역시 스페인과 얽힌 인연이 길어서 초콜릿으로 만드는 과자에는 일가견이 있는 동네다. 해마다 봄이면 이 마을에서 ‘유로 초콜릿’이라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여 얼뜨기 미국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낼 수 있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초콜릿을 입은 토끼고기 요리. 주세페 요리사가 만든 것과 같은 종류다.
주세페의 초콜릿 입힌 토끼요리와 라비올리 만두는 정말 놀랍고 특별했다. 초콜릿이 과자가 아닌 요리에 쓰인다는 건 보기 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토끼고기를 즐긴다. 특히 산토끼는 꽤 비싼 값으로 팔린다. 간혹 ‘사냥한 산토끼 요리’가 메뉴판에 오를 때가 있는데, 역시 예약을 해야 먹을 수 있는 요리였고, 그나마 겨울에나 볼 수 있는 명물이었다.

그럭저럭 ‘감베’ 여인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요리 시연을 보이는 차례가 됐다. 초콜릿을 뜨거운 물에 중탕으로 녹이는 동안 토끼고기를 손질하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살된 토끼의 머리를 잘라내면서 주세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엄청나게 밝은 방송용 조명등이 반쯤 벗겨진 주세페의 이마를 번들거리게 했다. 그런데 고기를 손질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중탕하던 초콜릿이 벌컥 끓어올라 치이익하는 소리를 냈다. 결국 엔지! 두 번째 토끼 머리가 잘라지고 주세페의 대머리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이 뚝뚝 스튜디오 바닥에 떨어졌다.

뿌지직 터진 짜주머니, 땀 흘리며 실수 연발

그럭저럭 토끼요리가 끝나고 만두를 만드는 시간이 됐다. 그 허연 감베의 여인이 초콜릿으로 반죽한 라비올리 만두피를 들어올리며 과장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멋져요, 멋져. “벨리시마!” 주세페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자, 이 만두만 마치면 시칠리아 시골 식당의 주방이 멋들어지게 로마 방송에 데뷔하게 되는 것이다! 흥, 보라지. 밀라노와 로마의 그 잘난 별 셋짜리 식당 요리사들도 할 수 없는 기발한 요리라고.

피를 길게 늘어놓고 소를 채우려 짜주머니를 높이 치켜든 주세페가 한껏 멋을 부리며 짜주머니를 꾹 눌렀다. 뿌지직하며 짜주머니가 터지고 소가 테이블 위 만두피에 쏟아졌다. “맘마 미아! 맙소사!” 지켜보던 시뇨라 마리아가 남편의 실수에 고함을 질렀다. 씽씽 돌아가던 카메라가 다시 스톱. “시뇨라 마리아, 논 코지!”(마리아 부인, 그렇게 하지 마시오)

알겠다고요, 호호. 하여간 늘씬한 감베 때문에 주세페의 만두소 반죽이 너무 되직했던 것이다. 그는 늘 한 숟갈의 따뜻한 물을 소에 섞었는데 아마도 그걸 깜빡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가 어찌어찌 물을 섞은 만두소를 다시 만들고, 카카오 색깔의 예쁘고도 깜찍한 시칠리아 라비올리가 완성됐다. 고작 10분 방송될 프로그램 촬영을 마친 건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시칠리아의 촌뜨기 주방장이 수도 로마의 방송에 데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정작 마을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이 위성으로만 송출되는 바람에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박찬일 뚜또베네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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