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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갯배 타는 곳’ 뒷골목에 함경도식 음식을 내는 식당들이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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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함경도의 억센 맛을 느낄 수 있는 실향민들의 앞마당, 속초 청호동 아바이마을
건넛마을로 가려면 갯배를 타야 한다. 폭 50m의 물길을 네모난 배가 건넌다. 배는 두 지역을 연결한 쇠밧줄에 꿰어 있다. 배에 탄 이들이 힘을 모아 쇠밧줄을 당겨야 배가 움직인다. 아바이도 당기고 아마이도 당긴다. 군인도 처녀도, 아저씨도 아줌마도, 초등생도 삽살개도 힘을 보탠다. 이들의 힘으로 배는 느릿느릿 짧지만 인상적인 항해를 한다. 나뉜 땅, 골 깊은 물길을 힘 합쳐 건너는 배다.
관광객들 몰리면서 떠오른 ‘명물갯배’
“이 봅세, 들어오기요.”
갯배 매표소 창문이 열렸다. “무스그 일로 사진을 그래 마이 찍슴메? 날래 들어와 커피 한잔 하오. 추운데.”
매표요원 김아무개(속초시 청호동 자치위원회·75)씨는 함경남도 홍원 출신 실향민이다. 17살 때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국군을 따라 내려왔다. 김씨는 이름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이 보오. 잘 드솝세(잘 들으시오). 이산가족 상봉인지 무스근지 우리느 모르는 사람들이오.” 주민 절반 이상이 실향민 가족인데, 단 한 명도 북의 가족을 만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상봉 신청해봐야 헛일이오. 만나게 해줄 텍이 없구마.” 북쪽이 싫어 국군 따라 내려온 이들에게 북측이 가족 상봉을 허용할 리 없다는 얘기다. 북쪽에 어머니, 큰형, 누나, 여동생을 두고 온 김씨는 오히려 “북에 남은 가족들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상봉신청 자체를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1세대드르느 발써 돌아가고, 고향 기억하느 우리 2세대도 멫 안 남았소.”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은, 답답하게 진행되는 상봉행사에서조차 소외된 채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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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배. 청호동과 중앙동을 잇는 요긴한 교통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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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은, 아바이들이 정착하기 전까지 허허벌판이었다. 청초호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긴 모래밭. 함남 출신 피란민들이 고향 가까운 이곳에 알음알음으로 모여들면서 실향민 집단거주지가 됐다. “며칠 뒤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출신 마을별로 움막집들을 짓고 임시 거처로 삼았다. 모래땅을 파내고, 나무판자를 이어붙여 벽과 지붕을 얹었다. 미군부대서 나온 기름종이를 덧씌워 빗물을 막았다.
“구두르는(구들은) 돌메이 깔고 도라무깡(드럼통) 짤라개지구 만들었습지비. 그래개지구 산에 가 낭구하고 검부르(검불) 긁어다 불 때고 쌀 빌어다 먹고 살지 않았슴메.” 그러고 50여년 세월이 흘렀다.
모래톱과 물길 구석구석 망향의 한과 상처가 녹아 있는 이곳에서 7년 전 드라마 ‘가을동화’가 촬영됐다. 실향민 집단거주지로만 알려졌던 아바이마을이 관광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동남아 지역의 ‘한류 관광객’ 발길도 이어졌다.
이제 드라마를 추억하는 여행객들의 발길도 잦아들고, 촬영지임을 알리는 낡은 간판들만 또다른 낯선 모습으로 남아 있다.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떠오른 것이 아바이마을의 명물 갯배다. 부월리로 불리던 이곳은 본디 중앙동 쪽과 이어진 땅이었다. 왜정 때 물길을 뚫어 청초호와 외항을 연결했다. 그때부터 물길 건너는 교통수단으로 정착된 것이 갯배다. 두 척의 갯배가, 한 척에 관리인 두 명이 배치돼 교대근무를 하며 운항한다. 실향민들은 지금도 중앙동 쪽을 개건네(개 건너)라 부른다.
갯배가 오가는 청호동 쪽 아바이마을 일부는 몇 해 뒤 항만 개발사업으로 철거될 예정이다. 45년째 함경도 음식 식당을 해오고 있는 단천 출신 실향민 윤복자(69)씨가 말했다. “내 요 알에(아래) 살지마느, 우리는 여기르 떠날 수 없소. 못 나가. 연탄재 다져 밟아 일군 따인데, 어딜 가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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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동 노인회장 박재권씨(왼쪽). 김송순(80)씨 집에 모인 실향민 아마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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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아마이들의 마음을 2세·3세들은 안다. 마을을 알리고 지키기 위해 젊은층이 모여 아사모(아바이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해 다양한 일을 펼치고 있다. 마을 유래와 현황을 소개하는 간판을 세우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고, 무료 자전거를 수십대 준비해 여행객들이 아바이마을을 둘러볼 수 있게 했다.
2세·3세들의 애틋한 마을 사랑이 “고향따이 눈앞에 훤한” 아바이 세대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 청호동 노인회장 박재권(76)씨가 필터까지 타들어가는 담배를 다시 한번 빨아 내뿜으며 말했다. “고햐이 그리워도 가족이 그리워도 다 지난 일이지비. 어느 세월에 만내 주꾸마.”
함흥냉면·가리국·명태식해 …
홍원 출신 실향민 이고분(81)씨가 말했다. “무스그 소리르 그래 세시게이(성급하게 덤비는 사람)처럼 하소. 내 소워이 거 뭐인가 하모야. 거저 단수일 내루 고향 한번 가보는 거이지. 어마이도 보고 싶고 ….”
청호동 아바이마을 여행길 입맛은 다부지고 억세게 함경도식으로 다스려야 한다. 단천식당, 다신식당, 아바이식당, 돌샘식당 등 아바이순대와 함흥냉면, 가리국(갈비국), 가자미식해, 명태식해 들을 다루고 갖춰 내는 식당들이 갯배 나루터 뒷골목에 몰려 있다. 고향이 그리워, 고향 맛이라도 느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속초의 아바이마을은 따스한 앞마당의 기억을 손맛으로 열어주고 있다.
이병학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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