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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13 21:42 수정 : 2008.02.17 15:14

강원도 태백 통리역.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자 순식간에 역사 주변은 눈세계다.

[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②
엽차 한 잔에 자리를 떠야 했던 태백 통리역의 향록다방에서 생긴 일

강원도 태백 통리역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저물고 하늘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스쿠터를 세우고 식당에 들어가 해장국을 시켰다. 몸에 한기가 들었는지 난로 옆만 좋다. 손님이 없어 주인양반은 문을 일찌감치 닫는다고 했다. 쫓겨나듯 식당을 나서는데 가로등 불빛에 흩어지는 눈송이들이 큼직큼직하다.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역사 주변은 눈세계다. 나는 구멍가게 처마 밑에 서서 하늘이 언제쯤 뻥 뚫릴지 가늠해보고 있었다. 죽음 앞에서 눈에 위로 받던 친구가 생각난다.

쌍욕과 울음, 그리고 무심한 커피

“대개 처음에는 함박눈이 쏟아지지요. 함박눈은 습설(濕雪)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의 먼지들을 다 씻어 내립니다. 그렇게 함박눈이 한참 쏟아져서 하늘이 뻥 뚫리고 나면 그제야 하늘에서는 건설(乾雪)이라 하는 바짝 마른 눈이 날리지요. 뭉쳐도 잘 뭉쳐지지 않는, 미세한 별빛 같은 눈결정이 꿈결처럼 하늘 가득 날린답니다.”

하지만 좀처럼 기다려도 아직 하늘에는 씻겨나갈 먼지들이 많은지 함박눈만이 펑펑 쏟아졌다. 오래 달려와서 피곤하긴 했지만 여인숙에 들어간다고 해도 좀처럼 잠 올 거 같지 않았다. 구멍가게 이층에 있는 다방에 들어섰다. 다방을 지키는 늙은 마담이 난롯가를 지키고 있다. 나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야간기차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을 요량이었다. 뜨내기가 많은 역전 다방이라 그런가, 마담은 난로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엽차 한 잔만 따라주고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다시 제 자리로 가서 티브이를 본다. 일행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주문도 받지 않는다. 뭐 이런 놈의 다방이 다 있나.

그때 오십 줄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문을 꽝 차고 씩씩대며 들어왔다. 한눈에도 술에 고약하게 취한 듯싶었다. 다방 문에서 마담이 앉은 자리까지는 고작 몇 발짝이지만 사내는 험하게 쌍욕을 해대느라 그곳까지 가는 데 한참이 걸렸다. 한데 마담 곁에 앉자마자 사내는 컥컥 큰 소리를 내며 운다. 마담은 무심히 커피를 내왔다. 조금 진정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누군가의 이름을 대며 그 자식 죽여 버린다고 한다.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커피 한잔 달라는 말도 못하고, 얼결에 그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사내는 트럭운전사다. 홀아비인지 총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든 넘은 노모와 단둘이 사는데, 모친은 건강이 안 좋아서 혼자서는 거동도 잘 못 하는가 보다. 사내는 멀리 며칠 다녀올 일이 있어서 떠나기 전에 친구에게 자주 모친을 좀 살펴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한데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보일러는 고장 나서 방이 완전 냉골이고 노모는 감기에 심하게 걸려 밥도 못 해 자시고 며칠을 굶었다는 것이다. 엊그제야 간신히 병원에서 퇴원하긴 했는데 가뜩이나 병약한 어머니가 이제 다 죽게 생겼다고.


어린 동생 달래는 듯한 늙은 마담의 모습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사내는 이야기 중간중간 멈췄던 울음을 다시 토해내고 또 친구 욕을 하고 앞뒤 없이 그랬다. 그는 참 많이도 울었다. 내가 그 다방에 앉아 있었던 시간이 넉넉히 한 시간은 넘었으니까. 하지만 늙은 마담은 그의 이야기를 열심으로 들어주고 있었다. 그들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나이 어린 동생을 달래는 누나의 모습이었다. 사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다방 문을 나섰다. 역사 앞에 세워둔 스쿠터에는 눈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좌석 밑에서 걸레를 꺼내어 눈들을 대충 털고 덮개를 씌웠다. 도로가 정리될 때까지 이곳에서 며칠 박혀 있겠구나 싶었지만 왠지 싫지 않았다. 고개 들어 바라보니 향록다방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뭔 놈의 저리 정다운 다방에서 나는 커피 한잔 못 얻어먹고 나오나. 언제부턴가 하늘에는 습설이 사라지고 별빛 같은 눈이 사박사박 내리고 있었다.

유성용/ 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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