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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간담 브이’ 장난감(왼쪽)과 ‘마크로스’로 재포장된 ‘스페이스 간담 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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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혁의 장난감공화국
몇 년 전 티브이에서 김청기 감독의 1983년 작품 〈스페이스 간담 브이〉 방영한 적이 있다. 나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지만 평화와 지구를 사랑하는 선량한 외계인이 지구인을 돕는다는 전형적인 공상과학물이다. 지구인이 강경파 외계인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때, 선량한 외계인이 비장의 로봇을 출동시키는데 그것이 ‘스페이스 간담 브이’다. 방송이 나간 직후, 인터넷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추억담이었지만 공통적인 지적 사항은 로봇의 디자인이었다. 〈스페이스 간담 브이〉의 로봇 디자인은 거의 100% 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을 모사했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로봇의 이름과 디자인이 각기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따왔다는 것이었다. 〈스페이스 간담 브이〉의 로봇 디자인은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발키리’라는 로봇의 모방이지만, 로봇의 이름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따온 것이다. 이를테면 ‘미키마우스’를 흉내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는 이름은 엉뚱하게 ‘아톰’이라고 붙여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모방이나 복제의 문제는 한국 애니메이션사 특히, 1980년대 한국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양산 시기에 멍에처럼 드리워진 역사적 사실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만들어낸 〈스페이스 간담 브이〉의 로봇 장난감이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디자인 원산지 일본의 기술진도 감탄했다는 것이다. 우주선과 로봇 등 3단으로 변신하는 원조 ‘발키리’보다 ‘스페이스 간담 브이’의 변신 시스템이 훨씬 부드럽고 정교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가 〈로보텍〉이란 제목으로 미국에 수출되어 인기를 끌 즈음 장난감 수요가 쇄도했는데 일본의 그 장난감 업체가 주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당황한 일본 애니메이션 업자는 한국의 ‘스페이스 간담 브이’를 만든 업체에 요청해 ‘스페이스 간담 브이’를 ‘마크로스’라는 포장재로 재포장해 수출했다. 지금이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많은 양의 ‘스페이스 간담 브이’가 ‘마크로스’로 수출된 흔적이 남아 있다. ‘하청에의 안주’와 함께 한국 애니메이션 성장의 커다란 장애로 자리 잡았던 한국 애니메이션 캐릭터 마케팅의 우울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김혁 장난감수집가·테마파크기획자 blog.naver.com/khegel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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