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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칠성면 삼거리. 오랜 경륜의 약방 위로 겨울볕이 빽빽하다. 유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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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③
괴산군 칠성면 세거리의 게으른 마담에게 퇴짜 당한 뒤 갈론마을로
김이 뿌옇게 서려서 고글을 걷어 올리고 달리면 남부끄럽다. 시속 60이 넘으면 눈물이 질질 난다. 엑셀을 더욱 당기면 시속 100킬로 언저리에서 눈물은 마른다. 번거로우면 속도를 높이곤 한다. 말하자면 눈물은 그 사이에만 기생하는 무엇 같다. 눈물의 생존 속도는 60과 100 사이다. 마음과 아무런 상관 없이 흐르는 것들과 속도를 견주며, 바짝 마른 억새들이 함부로 엉긴 괴강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괴산군 칠성면 세거리에서 스쿠터를 세웠다. 속도계가 뚝 떨어진다. 이 장소의 속도가 문득 아득해진다. 오후의 겨울볕이 잠시 따스한 내륙 깊숙한 이 삼거리는 텅 비었다. 차부 앞에서 중절모를 쓴 한 노인이 꿈쩍도 않고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옛날식 약방 앞에는 노랗게 페인트칠이 된 자전거 한 대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인적이 없다. 민방위 훈련 속처럼.
생존속도 60, 한계속도 100
코흘리개 하나가 가슴에 비닐 연을 품고 지나가며 큰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머뭇거렸다.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하니, 그는 소년병처럼 말했다. ‘안 돼요 … 무릎이 아프거든요.’ 잔망스런 놈 같으니라고.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썰렁했다. 무당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마담은 팔짱을 낀 채 시들먹하게 말했다. 아직 가게를 열지 않았다고. 나는 게으른 마담에게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핀잔하면서도 공손하게 다방을 나왔다. 좀처럼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차부 이용원’의 연통에서만 연기가 기신거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쌓인 연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겨울에도 간당간당해 보인다. 시간을 쥐었다 천천히 풀어내는 듯한 이 세거리는 왠지 정다웠지만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괴강을 끼고 다시 달려 ‘갈론 마을’에 접어들었다. 칡뿌리가 숨어있다는 갈은(葛隱) 마을을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마을 끝에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었다. 그 너머로 자드락길이 숲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스쿠터를 세우고 걸어 들어갔다. 산그늘 쪽은 고드름이 치렁치렁 달린 빙벽이었다. 몇 주 전에 내렸던 눈들이 얼녹아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물가에는 커다란 너럭바위들이 계속 이어졌다. 얼어붙은 시냇물에서 옥색이 비친다. 양지바른 한쪽에는 얼음이 녹고 맑은 물이 볕을 가늘게 쪼개며 졸졸졸 흐른다. 송사리 몇이 왔다갔다 한다. 나는 쪼그려 앉아 그 고운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반갑지만 속없이 중얼거려본다. ‘봄은 오시든가!’
몸에 한기가 스며 다시 마을 쪽으로 걸어 나왔다. 작은 폐교가 하나 있다. 교문도 없고 교패도 없지만 이 학교 이름이야 당연 갈론 초등학교겠지. 문들은 다 잠겨 있었다. 복도 쪽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양초칠이 됐을 법한 오래된 골마루가 볕에 반짝였다. 빛의 밀도가 빽빽하고 적요했다. 문이 잠겼으니 망정이지, 나는 마른 걸레를 타고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백 번은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심하다 심심해!’ 뒤쪽 수돗가에서 수도꼭지를 돌려보니 헛돌기만 했다. 볕이 줄어들자 칼바람이 불어온다. 마른 잎들이 큰 소리를 내며 함부로 뒤집히고 바로 놓이고 그랬다. 갑자기 시간들이 속도를 올리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공연히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솟을 것 같았지만 어디 눈물이 날 리 있는가. 눈물은 60에서 100사인데. 우두커니 앉은 나는 왠지 속도에서 열외 된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폐교도 뭐 열외이긴 한가지 같았다. ‘참내 무슨 이승복이라니. 책 읽는 소녀도 있네? 싸 보인다, 싸 보여.’ 잊혀져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들이 값어치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버려져서 나는 뜬금없이 그대의 안부를 물어본다. 안녕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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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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