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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드립보다는 융 드립(그물처럼 미세한 구멍이 있는 필터로 커피를 내리는 방식)이 섬세하다. 사진은 여의도의 ‘주빈’. 사진 이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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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 이명석의 카페정키
산울림 소극장 1층의 카페 ‘수카라’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문을 열자 나는 도쿄의 지유가오카나 기치조우지에 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자연스러운 질감을 살린 가구, 책장에 늘어선 일본 예술 잡지들, 주저하며 귓속을 찾아오는 노랫소리 …. 종업원의 인사에도 일본식 억양이 묻어 있는 듯했다. 결정적으로 에스프레소 음료는 전무, 커피는 오직 드립 커피만. “정말 일본이잖아!”일본 곳곳에는 작은 카페들이 잘도 숨어 있다. 허름한 간판이지만 멀리서 찾아온 커피광들이 줄을 서 기다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100년을 넘긴 유럽의 전통 카페들도 이제는 에스프레소가 핵심인데, 일본에서는 이상하게도 드립 커피 애착이 강렬하다는 점이다. 수십 년 역사의 장인 정신 때문만도 아니다. 지난주에 문을 연 깔끔한 카페에서도 “저희는 드립만 합니다”라고 말한다.
강렬한 머신의 압력으로 커피의 핵심을 뽑아내는 에스프레소는 놀라운 속도로 세계인들을 사로잡아 왔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 브라질까지, 각 지역에서 태어난 원두를 키우고 말리고 굽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섬세한 풍미 차이를 드러내는 데는 드립식을 따라올 수 없다. 거품경제 시대를 통과하며 세계 술시장을 뒤흔든 만큼, 고급 품질의 스트레이트 원두에서도 일본인들은 민감한 취향을 드러내 왔다. 유럽의 멜리타에 대비되는 칼리타, 고노 등 훌륭한 드리퍼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
‘커피미학’ 등 한국의 커피 전도사들 역시 일본을 거쳤기에 드립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에스프레소 일변도에 질린 젊은 바리스타들도 핸드 드립의 묘미에 빠지고 있다. 에스프레소는 머신의 역량이 워낙 중요한데, 소규모 카페는 고가의 장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요즘 작은 카페들이 드립에 주목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드립 카페에 가면, 나는 될수록 바에 앉는다. 에스프레소는 기차처럼 달려 나온다. 그러나 드립은 뜸을 들인 원두에 가는 물줄기를 달팽이처럼 흘려보내 서서히 커피를 거두어내는 느긋한 과정을 만끽하게 해준다. 동양인들이 드립에 더 큰 사랑을 느끼는 것은, 거기에서 다도와 같은 정제된 의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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