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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05 17:10 수정 : 2008.03.07 16:43

상한리 옛 공동정미소 앞에서 한 어르신이 땔감을 부리고 있다.

[매거진 Esc] 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돌담과 흙집조차 다 볼거리인 300년 전통 토종벌꿀마을, 곡성 죽곡면 상한리

섬진강 따라 가니 봄이 온다. 나른해진 물살이 속살 다 보여주고, 햇살 만난 여울은 꽃빛으로 반짝인다. 몸 비틀며 내려온 섬진강 줄기와 보성강이 만나 껴안고 구례·하동·광양으로 봄빛을 짜 내려가는 곳. 곡성군 죽곡면 봉두산 자락에 아지랭이 흙냄새가 아찔하다.

공동 메눌아기들, 공동 손주들

봉두산 밑 첫동네 상한리(웃한배미·하늘나리마을)에 망박골, 매내미골 얼음 녹은 물이 자지러지자, 20여 가구 40여명 어르신들도 봄맞이에 나섰다. 밭이랑을 뒤집고 벌통을 살핀다. 민박집을 단장하고 고로쇠 물을 받는다.


상한리의 ‘공동 손주’ 최호원군(왼쪽). 오른쪽은 방학을 맞아 놀러온 사촌누나.
최연소 마을 주민 최호원(5)군도 네번째 봄을 맞았다. 마을 이장 김재택(69)씨가 말했다. “요것이 말이여, 우리 마을 공동 손주랑게.”

5년 전 상한리에, 23년 만에 아기 울음소리를 터뜨려준 복덩이다. 부산 출신 홍수진(33)씨가 시집오면서 생긴 경사다. 호원이가 돌담길, 논밭둑길을 재잘재잘 내달리면 마을이 다 환해진다.

상한리 어르신들은 올봄 또 ‘공동 손주’ 하나를 볼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1년 전 캄보디아에서 짠튼(26)과 싸롬(24)이 시집을 왔는데, 이 두 새색시 중 싸롬이 4월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그들이 자꼬 울어싸야 마을이 마을답게 되아가는 것이제. 그렇지 않소잉.” 노인회장 김재우(74)씨가 말했다. “두 시악시는 우리 마을 공동 메눌아가 되아부렀어야. 아, 인사도 말도 일도 음식도 담숙담숙 잘허닝께로 다 좋아하지라.” 한 달 뒤엔 또다른 캄보디아 처녀가 시집올 예정이어서 상한리 주민의 평균 나이는 지속적으로 낮아질 전망이다.



꿀이 들어찬 토종벌꿀통.
고로쇠물이 든 비닐을 살펴보는 마을 추진위원장 강병조씨.

옮겨온 이들과 주민들이 별 마찰 없이 사는 건 옛날부터 탄탄하게 다져온 공동체 의식 덕이다. 산속에서 어떻게든 살자니 무슨 일이든 품앗이 형태로 도와야 했다. 웃한배미란 마을 이름은, 땀을 빼야 먹고사는 위쪽 논배미란 뜻이다. 다랑논에서 농사지은 곡식을 모두 지게로 져 나르느라 서로 돕고 땀을 흘려야 했다. “국방군·인민군 번갈아 들이닥쳐도 마을 사람들은 합심해 서로 입조심하고 감싸며 버텼다.”

주민의 선조들은 300년 전 순천 서면에서 이주해 와 마을 위 골짜기인 망박골에서 살다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김재택씨가 말했다. “우리 동니가 요 근방서는 명풍(명당)인디, 쯔으기 진작부터 ‘육천기지연후 대길’(六遷基地然後大吉·터를 여섯 번 옮긴 뒤에 아주 좋아진다)이란 말이 내려온당게라.” 조상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곳에 옮겨왔고 전쟁 때도 몇 번 마을을 비웠다가 들어왔으니, 좋은 때가 다가왔을 것이란 얘기다.


산골밥상을 받은 방문객들.
300년 전부터 조상에게 이어받은 일이 토종벌꿀 생산이다. 지금도 집마다 울 안에 벌통 없는 집이 없다. 마을 추진위원장 강병조(55)씨가 말했다. “마을서 한 450군(통) 하는디, 꿀맛이 좋아부링께 단골들헌티 팔아도 모자래부립디다요잉.” 벌들이 싸리꽃, 국화, 밤꽃, 감돌개(감꽃) 등 수십 가지 꽃에서 모아 와 만든 잡꿀을 겨울철에만 뜬다. 옛날식으로, 소쿠리에 받치고 주물러 흘러내리게 해서 꿀을 받는다.

토종벌꿀 마을 전통은 몇 년 전 시작한 농촌체험 행사에도 주요 테마로 등장했다. 방문객들이 가장 즐기는 행사가 꿀 뜨기와 꿀벌 생태 체험, 밀랍공예 등이다. 밀랍으로 양초도 만들고 인형도 만든다.

합심하는 전통도 체험행사에서 빛을 발한다. 어르신들은 다봉관(체험관)에 모여 행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든다. ‘공동 메눌아기들’도 일손을 돕고 ‘공동 손주’는 재롱을 부린다. 22가구 중 19가구에서 방마다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민박집을 꾸며 체험객들을 맞는다. 난방엔 장작을 때는 나무보일러를 쓴다. 안양에서 찾아와 하룻밤을 지낸 김수현(57)씨 가족이 앞다퉈 한마디씩 했다.

“공기가 정말 좋고 밤엔 별이 쏟아져 내립디다.” “나는 나무 타는 냄새가 제일 좋았어요.” “밥상에 오른 반찬들이 다 보약 같아요.” “뭣보다도 이 훈훈한 고향 냄새지.”


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반찬들이 다 보약 같아요”

국도변에서 굽이굽이 산길 따라 4㎞, 특별한 볼거리 없는 이 산속 마을에선 수십년 전 풍경을 간직한 골목과 돌담, 흙집들이 다 볼거리다. ‘76년 제4차 특별지원사업’으로 지어진,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고 적힌 공동 정미소 건물과, 아랫간에서 똥돼지를 키우던 2층 변소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노인회장 김재우씨가 정미소를 가리켰다. “쩌그서 베를 찧으문 좌간 밥맛이 겁나게 맛있었당게로.”

상한리는 하늘나리마을이라 한다. 여름철 산골마다 하늘나리가 만발한다.

“음식 솜씨가 겁나불게 좋다”고 알려진 전 부녀회장 서애순(59)씨가 요즘 방문객들에게 차려내는, 5천원짜리 밥상에 오르는 반찬은 이런 것들이다. 다래순무침·염장두릅무침·매실장아찌·능이버섯무침·감장아찌·더덕무침·고들빼기무침·고춧잎·우엉·머웃대·호박말랭이 …. 다 땀을 빼면서 서로 도우며 가꾼 웃한배미 농산물들이다.

곡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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