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윤선도가 노닐던 푸른 절벽에서 선홍빛 꽃망울 터뜨리는 동백과의 만남
‘땅끝’이라는 땅이름에 이끌려 전라남도 해남땅 땅끝으로 달려온 사람들은 아직 끝에 다다르지 않았음을 깨닫고 돌아간다. 대륙의 끝에 가면 무언가 보일 거라는 기대에서 왔으나, 여전히 다도해는 아무 말이 없고 관광지스러운 위세에 퍼뜩 현실로 귀환하는 것이다. 그때 보이는 게 보길도다. 해무에 휩싸여 곱게 둥지를 튼 보길도는 15세기 조선의 유학자 윤선도가 이상향을 꾸민 곳이다. 땅끝 보길도에 이르면 진정 세상을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들까? 노화도 잇는 다리 개통… 배편 많아져 예전엔 땅끝에서 차진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두 시간을 기다리기 일쑤였으나, 지금은 보길도 가는 바닷길이 훨씬 수월해졌다. 지난 1월 말 보길도와 인근 노화도 사이에 보길대교가 개통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노화도 가는 배를 타도 쉬이 보길도를 갈 수 있게 됐고 그만큼 배편도 많아졌다. 보길도와 노화도를 합쳐 하루 스무차례 가까이 배가 뜬다. 지금 보길도는 그 어느 때보다 북적댄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온 게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이다. 인조는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고 빈궁과 원손대군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고향 해남에 머물던 사대부 윤선도는 집안의 노복 수백을 모아(그는 해남의 제일가는 권세가였다!) 오랑캐와 싸우려 강화도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미 청이 함락한 뒤였다. 윤선도는 다시 세상을 보지 않을 결심으로 탐라로 향했다. 그러다 들른 곳이 보길도였다. 보길도는 “산들이 둘러 있어 바닷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맑고 소쇄하고 천선이 절승하니 물외의 가경”이었다. 윤선도는 계곡이 흐르는 곳에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머물렀다. 부용동 원림은 윤선도가 자연을 활용해 조성한 조선시대 대표 정원이다. 계곡 중간에 천연 암석으로 보를 쌓아 인공 연못을 만들고, 거기에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정사각형 건물. 연못 건너편엔 축대를 쌓아 기녀들이 춤추게 했다. 유학자로서 호연지기를 키운다던 그의 보길도 생활은 이렇게 번화했다.고향 보길도에 돌아와 일했던 시인 강제윤은 시집 <보길도에서 온 편지>에서 “(윤선도가) 낭만적인 시인이 아닌 지배자로 군림하며 섬 주민을 억압한 권력자”인 측면도 있다고 썼는데, 이 지적이 맞춤하다. 이 작은 섬에 그는 화려한 정원과 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등을 지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부용동 원림을 나오면 동천석실에 오르는 게 일반적인 경로다. 동천석실은 해발 100여미터 안산 중턱에 윤선도가 세운 공부방이다. “마을 북쪽 산허리에 있는 암석이 절승이다. 육중의 석문을 지나면 푸른 절벽과 층층대가 있는데, 그 위에 작은 집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하였다”는 게 <고산연보>의 기록이다. 윤선도는 이곳에도 석간수를 모아 연못을 조성하고 집을 지어 책을 읽었으며 바위에 도르래를 매달아 아래에서 음식을 받아먹었다. 보길도는 푸릇푸릇하다. 검은염소는 풀을 뜯고 파마머리 할머니는 광주리를 끼고 쑥을 캔다. 소나무에는 연둣빛 이끼가 끼었으며, 황토에서는 노란 싹이 움텄고, 동백은 선홍빛 꽃망울을 터뜨렸다. 반갑다 초록아! 땅끝까지 남하한 대륙과는 다른 풍경이다. 신동엽은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시 ‘봄은’ 중에서)고 했지만, 3월의 봄은 보길도에 잠시 머무르다 오는 것 같다. 보옥리로 가는 해안길도 봄이 가득 찼다. 절벽에 핀 동백의 선홍빛도 따갑고, 아스라한 태양을 튕겨내는 푸른 바다도 따갑다. 절벽을 구비구비 돌아 만난 곳에 ‘뾰족산’이 뾰족하게 솟았다. 그 아래 보옥리가 있다. 보옥리는 관광지가 된 보길도에서 한적하게 하룻밤을 보내기 좋은 곳이다. 1992년에야 찻길이 뚫려 이십 리 고갯길을 면했다는 보옥리엔 아직 어촌 풍경이 남아 있다. 한적하게 하룻밤 보내기 딱 좋은 보옥리 보옥민박에 여장을 풀었다. 보길도닷컴(bogildo.com)을 운영하는 천기철씨가 “보길도에 남은 마지막 한옥 민박”이라고 치켜세운 곳이다. 원래 보길도에는 안빈낙도의 정취를 풍기는 한옥 민박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이름난 백록당도 과객을 받지 않고, 시인 강제윤씨가 떠난 찻집 ‘동천다려’도 찻손을 받지 않는다. 보옥민박은 1980년대식 바닷가 민박이다. 그때 민박들이 으레 그러했듯, 별채를 지어 일렬로 온돌방을 냈다. 페리오치약이 놓인 화장실에서 웅크리고 세수하다 보면 바지 섶이 젖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건 주인 김옥동(60)씨의 따뜻한 심성과 뒤뜰 정원, 그리고 어촌정식이다. 1984년 지은 빨간 지붕 한옥집 뒤안에는 300여 년 전 윤선도가 지은 것처럼 ‘자연형 정원’이 있다. 고무대야로 화분을 삼고 파이프를 엮어 평상을 만들고 ‘보로크’ 벽돌로 돌다리를 놓았다. 정원은 뒤뜰 언덕의 바위와 동백숲으로 이어지다가 산과 하나가 된다. 뒤뜰 바위에 오르면 바다도 정원으로 들어온다. 이튿날 아침에는 공룡알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해변 갯돌이 공룡알 만하다 해서 공룡알 해변이다. 민박집에 돌아와 보니 5천원짜리 아침 밥상을 차려놓았다. “운 좋은 줄 아소. 장어를 잡았응께. 우리 먹는데 같이 드리는 거요.” 보길·노화도=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갯돌들이 바다를 연주하네 예송리는 잔돌, 보옥리는 큰돌 많아 소리도 달라 보길도에는 괜찮은 해변이 네 군데다. 중리와 통리는 전형적인 모래밭이지만, 예송리와 보옥리는 자갈(갯돌) 해변이다. 해안절벽의 암석이 풍화와 침식으로 떨어져 파도에 깎이면서 둥근 자갈이 됐다.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1999년 보길도의 갯돌에게 풀꽃상을 줬다. “보길도 해변의 갖가지 갯돌들은 바다를 연주하는 신비의 악기들과 같습니다 … 우리는 이 놀랍고 경이로운 갯돌들이 본래 있던 자리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무심히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과 사람의 참다운 관계를 일깨워준 보길도 해변의 갯돌들에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2회 풀꽃상을 드립니다.” 갯돌이 바다를 연주하는 소리는 예송리와 보옥리 해변에서 들을 수 있다. 작은 갯돌들이 밀려온 파도에 씻겨 내려가면서 내는 소리다. 예송리는 잔돌이, 보옥리는 큰돌이 많다. 두 해변에서 자갈들이 내는 소리는 다르다. 예송리의 갯돌들이 파도와 함께 ‘철썩, 까르륵까르륵~ 철썩, 까르륵까르륵~’ 소리를 낸다면, 보옥리에선 좀더 귀기울여야 들을 수 있다. ‘철썩, 철썩, (까르륵), 철썩, 철썩’. 보옥리 갯돌은 공룡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크다. 공룡알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타조알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언뜻 듣기에는 갯돌 씻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가만히 파돗소리에 침잠하면 공룡알 사이에 숨은 작은 갯돌들이 까르륵거리는 소리가 낮고 짧게 흐른다. 마치 파도에 숨어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자세히 보면 보옥리 갯돌들은 층층 계단을 이루고 있다. 타조알 크기의 갯돌은 맨 아래층에, 달걀 크기는 중간층에, 콩알 크기는 가장 위에 있다. 가벼운 갯돌일수록 뭍에 가까워졌다. 파도가 계단을 만들었다.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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