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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2 22:20 수정 : 2008.03.16 13:50

바닷가다운 안주들이 촘촘히 적힌 요술소주방 미닫이문 아래 사내 하나가 쭈그려 앉아 있다. 유성용

[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④
대진항의 초양다방을 나와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만난 요술소주방

진부령을 넘어 통일전망대 입구에 도착했지만 스쿠터로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해금강이 바라보이는 최북단에서 똘똘이 스쿠터와 기념촬영이라도 한 컷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니 대진항이다. 이 마을에는 남한의 최북단에 있는 것들이 즐비하다. 이곳에 다방이 있으면 최북단의 다방이고, 소주방이 있으면 역시 최북단의 소주방이다. 대진의 꽤 경륜 있는 다방은 ‘초양다방’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항구 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항구의 풍경을 즐기기 좋다. 마담에게 이 집 이름이 왜 초양다방이냐고 물어봤지만 마담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다방에서는 마담과 레지들이 손님들보다 오히려 더 뜨내기다. 그저 내 맘대로 이 일대에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초양이 차린 다방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동해바다에 아침 일찍 뜨는 해라고 해서 초양(初陽)인 듯싶다.

우물가 처자의 다방식 버전?

스쿠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다방에 멈춰 서면 세수부터 한다.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자 마담이 한구석의 쪽문을 가리킨다. 들어가 보니 옛날식 쪼그려 앉는 변기만 달랑 있는 변소였다. 변기에는 파란색 고무호스가 축 늘어져 있다. 일 보고는 그 끝에 달린 수도꼭지를 틀어서 용변을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변기에 닿아 있는 부분을 잡기도 그렇고 해서 난처해하고 있는데 그때 변소로 따라 들어온 게 박양이었다. 내가 무슨 일인가 해서 좀 당황하자 박양이 호스를 잡아주며 말했다. “손 씻으세요.” 나그네에게 버들잎을 띄워서 물을 건네었다는 우물가 처자의 다방식 버전이구나 싶었다. 고맙다는 말 대신 나는 너스레를 떤다.

“이 처자야, 남정네 변소 들어가는데 이렇게 막 따라 들어오면 어떡해.”

박양은 조잘조잘하는 제 수다에 맛이 들렸는지 배달도 미루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중에 재미났던 이야기 하나. 대진의 영감님들은 젊어서부터 경륜이 쌓인, 다방 문화의 선수들이라 아가씨들의 속사정과 고충을 잘 헤아려준단다. 하지만 바로 아랫마을 간성은 어떻게든 한번 자보려는 생각밖에 없는 젊은 양아치들 천지란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간성은 바닷가랑 쫌 떨어져 있어서 자영업 하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아가씨들 인물만 더 따진단다. 상업을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남들 이목에 더 신경 쓰는 것 같다고. 아빠 같은 대진의 영감님들이 이쪽 계통의 선수들이라는 말에 자꾸 웃음이 났다. 그럼 대진의 아빠 손님들이 어떻게 아가씨들 고충을 헤아려주냐고 묻자 박양이 아주 구체적인 이유를 댄다. “이곳은 밤 9시쯤 나가면 12시까지 시간 값을 한번에 쳐줘요, 그러니 9시까지만 다방을 열면 되죠.” 다른 지역 다방은 저녁시간이 되면 서로 배달 나가려고 한단다. 미리 불려 나가지 못하면 자정까지 혼자 남아서 전화 받고 배달 나가고 해야 하기 때문에 죽어라 고생한다는 이야기다. 나도 맞장구를 쳐줬다. “역시 아빠 같은 분들임에 틀림없구나야. 근데 초양은 도대체 어디 있는겨?”

내가 가난한 여행자란 걸 눈치 챈 건지 박양이 싸게 여관방을 잡아줬다. 하긴 스쿠터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하자 박양이 기가 찬 표정을 짓고는 처음 물은 게 밥은 안 거르고 다니냐는 거였다. 정 많은 박양 덕에 좋은 방을 싸게 잡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아서 대진항의 깜깜한 밤거리를 할 일 없이 어슬렁거렸다.


그대 한잔 들이키고 별세계를 헤매는가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가게들은 다들 일찌감치 문을 닫았는데 저 멀리 교회의 십자가 아래, 무슨 연둣빛 광선이 환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간판에는 이런 글자가 박혀 있었다. ‘요.술.소.주.방’ 희한한 이름이구나 싶었다. 바닷가다운 안주들이 촘촘히 적힌 미닫이문 아래 사내 하나가 쭈그려 앉아 있다. 사내는 저 요술 소주방에서 한잔 들이키고 지금 별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딘지 쓸쓸해 뵌다. 살면서 환상의 유혹들을 되도록 멀찌감치 미뤄두고 싶지만, 그래도 혹 그런 게 필요하다면 우리나라 최북단의 이 요술소주방에서 소주 한잔 꺾는 걸로 이 세속의 알 수 없는 상처들을 위안하면 어떻겠는가 싶었다.

그나저나 호스 잡아주고 여관 잡아준 박양에게 소주 한잔 사야 하는데.

유성용 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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