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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2 22:40 수정 : 2008.03.12 22:40

커피는 풍미에 어울리는 잔에 담겨야 비로소 완벽하게 즐길 수 있다. 이명석.

[매거진 Esc] 이명석의 카페정키

‘ㅅ 카페’는 정겨우면서도 두렵다. “오랜만에 오셨네. 요즘은 어디 다녀?” 근엄한 사장님의 단골 관리 멘트 때문이다. 이거야, 나의 방탕한 카페 편력을 나열할 수도 없고. 사장님이 없는 때에 들러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고 도망가곤 한다. 그런데 이게 뭐지? 나는 정체 모를 이물감에 인상을 쓴다. 원두가 바뀌었나? 기계 탓인가? 어느새 사장님의 광채 나는 머리가 눈앞에 와 있다. “어때?” “뭐, 뭐가요?” “우리, 잔 바꿨거든.”

장이 아니라 뚝배기가 문제였다. 예전의 밋밋한 도자기 잔 대신에 산뜻한 스테인리스 잔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게 말이다. 속이 비어 가볍고 보온성이 좋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차가운 금속에 입술을 대고 혀 안으로 커피를 집어넣는 순간, 그 온도 차이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만다. 미리 잔을 예열해 두면 괜찮을까? 그래도 아닌 것 같다. 그 가벼움 자체를 견디기 어렵다. 30㎖도 채 되지 않는 에스프레소는 그 가벼움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그 묵직한 바디감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무거운 잔에 채워줘야 할 것 같다.

방과 후 운동장의 수도꼭지처럼 드리퍼나 퍼컬레이터에 입을 대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잔이 함께한다. 우리의 눈은 잔을 바라보고, 손가락은 잔을 만지고, 입술은 잔을 먼저 맛본다. 화분 없는 꽃은 있지만, 잔 없는 커피는 없다.

가볍고 위가 넓은 홍차의 잔이 반투명한 차의 색채를 감상하게 하듯이, 연하게 내린 드립 커피는 순백의 잔이 어울린다. 이스탄불 토카피 박물관에 있는 황금 세공의 잔도 감사하겠지만, 지나친 장식은 커피의 순수함을 해치기도 한다. 시애틀 스타일의 카푸치노라면 도회적이면서 이국적인 문양이 들어가 있어도 괜찮다. 층층이 커피와 우유가 섞이는 모습을 만끽할 수 있는 유리잔을 꼭 아이스 메뉴에게만 맡겨둘 필요도 없다.

가끔은 훔쳐 나오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물건들도 있지만, 카페 체인의 도톰한 머그는 대체로 멋이 없다. 차라리 텀블러를 들고 가 할인도 받고, 지구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런데 에스프레소용 텀블러는 어디서 구하지?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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