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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9 18:09 수정 : 2008.03.19 18:09

“나는 비닐백이 아니랍니다”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의 모토는 맥도날드와 다르지 않다. 트렌디한 젊은이들 입맛에 맞춰 대량 생산한 뒤 값싸게 팔아라! 서울에도 매장이 생기기 시작했거나 곧 생길 예정인 갭과 자라와 에이치앤드엠(H&M), 유니클로 등이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패스트 패션 열풍의 주인공들이다. 이에 응대하는 소비자들의 모토. 지금 가장 ‘핫’한 옷을 싸게 산 뒤 한 철만 입고 과감하게 버리리라!

하지만 온건한 환경주의자로서 패스트 패션을 소비하는 건 조금 겸연쩍은 일이다. 패스트 패션은 새로운 패션-환경 재앙의 주범 중 하나다. 한 철이면 생명이 끝나는 옷들은 옷장으로 직행한 뒤 수거함에 버려진다. 경험으로 보자면 한 70%의 옷들은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한다. 그렇게 수거된 옷들은 소각장으로 직행한다. 소각장에서 불탄 옷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뿜어낸 이산화탄소는 모두가 알다시피 온난화의 주범이다. 내가 버린 갭의 지난 시즌 옷들은 강릉 어부의 그물에서 최소한 수십마리의 명태를 사라지게 만들었을 게다.

정치적으로 공정하길 원하는 패스트 패션 중독자들의 존재론적 고민은 거기서부터다. 그렇다면 대체 뭘 할 것이냐. 다행히도 그들의 얇은 고민을 해결해줄 아이템이 하나 있긴 하다. 에코백(Eco-Bag)이라고 이르는, 캔버스로 만든 얇은 면가방이다. 스스로를 ‘환경친화적 가방’이라 일컫는 이 면가방은 지난해 말부터 패션계의 뜨거운 아이템으로 등극했다. 주말 저녁 홍대는 시장용 면가방에 값비싼 지갑과 소지품을 집어넣고 우아하게 거리를 활보 중인 여인들로 가득하다. 아니 그들이 대체 언제부터 생활 속 그린피스 회원이 됐냐고? 그게 다 거대한 럭셔리 레이블들의 전략 아니겠나.

에코백 붐을 일으킨 건 영국 디자이너 아냐 힌드마치의 “나는 비닐백이 아니랍니다”(I'm not a plastic bag)라는 가방이다. 힌드마치가 환경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으로 값싸게 판매한 이 면가방을 키이라 나이틀리, 린지 로한 같은 배우들이 들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들의 사진이 인터넷에 뜨는 순간 전세계 패셔니스타들이 가게로 달려가 “환경가방!”을 외치며 장렬하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 가방을 한정 판매한 도쿄의 한 가게는 패셔니스타를 꿈꾸는 일본 처녀들의 니킥과 하이킥이 오가는 케이원(k-1) 무대로 돌변했다고도 전해진다.

환경 좋아하고 자빠졌네. 이게 다 가난한 년놈들의 럭셔리에 대한 갈망이 촌스럽게 폭발한 이상 고온 현상이니, 환경에도 좋을 게 없을 거라고 여긴다면? 사실 힌드마치나 마크 제이콥스 같은 일류 디자이너들의 에코백은 비싸지도 않다. 나에게는 5달러를 주고 산 마크 제이콥스 에코백이 하나 있다(배송비가 15달러 들었으니 합쳐서 21달러라고 해두자). 이 백이 나에게 가져다 준 마음의 평안은 두 가지다.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첫째, 럭셔리 패션을 향한 사라지지 않는 가난뱅이적 갈망의 충족. 둘째, 합성섬유로 만든 가방을 들지 않는다는 환경보호론적 자긍심의 충족. 마크 제이콥스 가방에 오징어젓갈을 사 담고 마트를 활보하는 즐거움은 해본 자만이 안다.

브랜드에 무심한 척 시크하게 자기만의 환경가방을 갖고 싶다면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5천원짜리 하얀색 면가방을 사면 된다. 거기에 오공 시절 대학가에서 대자보를 쓰던 경건한 심정을 되살려 이렇게 써넣으시라. ‘저는 비닐백이 아니랍니다. 저는 패션이 아니라 환경 때문에 이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혹은, ‘이 환경친화적 면가방은 대운하 건설을 위한 모래 운반용으로 쓰일 예정입니다.’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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