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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9 22:02 수정 : 2008.03.19 22:02

에펠탑 위에서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고 다시 찾은 파리에서. 제너럴 아이디어 제공.

[매거진 Esc] 최범석의 시선 26

요즘은 컬렉션 기간이라 준비하고 기대하느라 바쁘기도 하지만 더 바쁜건 인터뷰 요청이 많기 때문이다.

디자인 영감을 어디서 받는가? 이번 컬렉션에 어떤 음악을 쓰는지? 브랜드의 전체적인 방향은?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뮤즈가 있는가? 누구인가? 자신에게서 패션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가?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을 것 같은가? 정확히 5년 뒤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은가? 몇 퍼센트의 행운과 몇 퍼센트의 노력이 자신을 이 자리까지 오게 했는가? 등등.

파리의 옷쟁이들 앞에 창피했었지

두서없이 답변을 써내려가다가 갑자기 이 질문에서 난 좀 생각을 해 봤다. 어떻게, 왜 디자이너가 되었는가? 옷을 만든 지, 디자인을 한 지는 좀 지났지만 갑자기 나도 왜 디자이너가 됐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전에 책에 쓴 것처럼 그저 생계유지의 수단이었는지, 나의 삶을 살아가려는 방책이었는지 다시 한번 짚어보려고 한다. 이제 더 큰 시장으로 나가려 하는데, 내가 날 알지 않으면 누가 나를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내가 왜 디자이너가 됐는지 더듬어 보니 20대 초반 갔던 유럽여행이 떠오른다. 처음 간 유럽 땅에서 나는 외국 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감과 자존심이 조금 상해서 돌아왔다. 한국에서만큼은 내 또래 가운데 정말 옷 잘 입고 옷도 잘 만든다고 혼자 자부하던 나였다. 그때는 다들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할 수도 있는 나이니까 그랬겠지만.

특히나 파리는 큰 충격이었다. 나보다 옷 잘 입고 감각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다 한국의 패션이나 내가 만들던 옷보다 훨씬 멋진 옷들을 한국보다 싸게 팔았다. 내가 어렵게 만든 옷보다 근사한 옷을 내 옷보다 싸게 살 수 있다니 …, 멍한 느낌으로 혼자 파리 거리를 쏘다니다가 에펠탑 앞에 섰다. 해가 지려던 참이었다. 저길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맥주를 사서 올라갔는데 디자이너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에도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오래 혼자 이야기를 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참을 나의 정체성, 나의 실력, 나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서 에펠탑과 약속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파리의 옷쟁이들 앞에 창피하지 않게 오리라고, 더 잘해서 오리라고 말이다. 그 다짐이 나를 디자이너로 만든 약속이 아니었나 싶다.


며칠 전 우리 직원 한 명이 나에게 어떻게 성공을 했냐고 물었다. 난 파리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나에게는 넘어야 할 큰산이 있다고 대답했다. 예를 들어 드리스 반 노튼은 어머니의 옷장에서 그의 모든 디자인을 끌어냈다고 한다. 그가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하며 들어가 놀던 엄마의 옷장에서 이미 디자인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최범석의 시선
나이가 들어 해산물 요리를 배운 사람과 어릴적 부모가 배에서 잡은 고기를 바로 회 떠서 먹으며 자란 사람의 미각을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이제 내가 넘어야 할 산은 드리스 반 노튼 같은 디자이너에게 밀린 20년의 격차를 따라잡는 거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에펠탑과의 약속을 되새기며

내가 다시 에펠탑에 올랐던 것처럼 다시 한번 나와의 약속에서 이겨보려 한다. 며칠 전 읽은 글이 생각난다. 성공은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하루하루 노력하는 게 쌓이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철학이고 모두에게 필요한 철학인 것 같다. 요즘처럼 신데렐라를 꿈꾸는 이들이 많은 시대에는 특히나 말이다.

최범석 패션디자이너·제너럴아이디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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