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수몰과 이주의 아픔을 딛고 산야초 체험행사로 도약하는 제천 수산면 하천리
마을은 사라져 간다. 어르신들만 남으면 잊혀져 가고, 떠나면 사라진다. 주민은 남고 싶은데 사라져야 하는 마을도 있다. 제천시 수산면 청풍호숫가 하천리 산야초 체험마을은 잊히고 사라질 뻔하다 겨우 살아남은 마을이다. 주민들은 수백년 내려온 삶의 터전을 잃은 슬픔과, 남의 마을에서 더부살이하는 설움을 겪었다.“암, 죄 겪었지. 저 아래 살다 쬐껴 올라왔어. 동네 이름두 읎어질 지경으루 갔다가 제우 살어남았지.” 아침에 잡아 갓 삶았다는 뜨거운 돼지고기와 시루떡을 권하며, 노인회장 이정환(75)씨가 말했다.
‘천연염색 부부’의 등장으로 활력
하천리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돼 물길 위쪽으로 옮긴 마을이다. 내매·골무실 등에 70여 집이 살다, 수몰 뒤 뿔뿔이 흩어지고 열 집 정도만 지금 자리(진경동)에 옮겨와, 본디 살던 네 집과 마을을 이뤘다. “돈 있는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가난한 이들만 먹고살기 위해 남아” 윗마을 상천리에 편입돼 한동안 살았다.
편입돼 살면서 주민들의 “심사가 뒤틀렸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 이장 김남수(59)씨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운한 게 왜 읎어유. 저 울루다 송이 따러 가두 말이 나오구, 회(작목반 모임)할 때 의견을 내두 저기 하구, 초상 나면 상여두 우에꺼 빌려다 쓰는데, 이게 죄다 껄끼러운 거지유. 그래서 말이 나온 게, 이럴 바엔 우덜이 독립을 허자아 말이지. 그랬던 거래유.”
“우리 마을 되살려야겄는데 으특할 거냐”는 주민들 제안을 시에서 받아들이면서, 하천리 주민들은 10년 만에 마을 이름을 되찾았다. 들머리에 큼직한 표지석과 마을 유래비를 세우고, 각종 작목반도 꾸렸다. 150만원을 들여 꽃상여도 만들어 왔다. 마을 상징물이 없어, 물가 논바닥에 뒹굴던 문인석을 찾아다 세웠다. 전전 이장 이정관(59)씨가 말했다. “이걸 세우니까는 으트게들 알았는지 와서들 팔라구우 팔라구 하는 걸, 안 팔구 여지껏 지켰지유.”
이랬던 마을에 8년 전, 약초를 이용해 천연염색을 하는 김태권(43)·송영선(39)씨 부부가 이주해 왔다. 젊은 부부가 나른하던 마을에 변화를 불러왔다. 주민들은 김씨가 운영하는 염색체험 행사에 도시민들이 몰려들자 큰 자극을 받았다. 다섯 가구가 김씨와 함께 약초·산채 관련 체험행사를 시작했다. 일부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촌진흥청 지원을 받아 체험관을 세우고 숙박시설도 들였다. 약초를 이용한 손수건 염색, 약초주머니·비누·떡 만들기 등을 진행하자 도시민들이 찾아왔다. 체험마을 사무장을 맡은 김태권씨가 말했다. “초기엔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매결연 맺은 기업이 도와주고 해서 요즘은 재방문율이 절반을 넘습니다.”
지금은 20여가구 중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제외한 아홉 가구가 참가한다. 체험 일정은 대체로 이렇다. 체험 뒤 황기·엄나무·오갈피나무 등 약초를 이용한 음식과 산나물 반찬이 나오는 식사를 한다. 갖가지 약초를 우린 물에 삶아낸 한방수육을 안주로 약초막걸리를 마신다. 황토 구들방에서 약초베개를 베고 잠을 잔다. 아침엔 사상체질별로 산책방법이 표시된 산책로를 거닐 수 있다. 사상체질 분석은 누가 해주나. 옆마을 만덕사 주지 성각(66) 스님이 도와준다. 스님이 말했다. “마을을 위해선 어르신들도 나서고 중도 나서야죠. 농촌이 잘돼야 도시민들도 즐거워집니다.”
주민들은 지난 1월 김태권 사무장의 지원 아래 일본 농촌마을 견학을 다녀온 뒤 새로 자신감을 얻었다. 체험행사를 상천리의 숯가마찜질방과 연계하는 등 위·아랫마을 상생도 꾀한다. 지금까지 수익은 대부분 시설확충 등에 들어가, 실질적 주민 소득은 별로 없었다. 올해부턴 마을법인 충당금(10%)을 뺀 나머지를 참가 주민들이 나눠갖게 된다.
일본 마을 견학 뒤 이번엔 베트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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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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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돼지고기·시루떡 잔치가 벌어진 건 마을 고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다투지 않고 화합하며 발전하길 기원하는 고사다. 이정관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 마을이 잘될라구 그러는지, 통돼지를 꽂은 삼지창을 소금 우에 세우는데, 저게 과연 서까 서까 했디만, 그냥 바루 딱 서버립디다 그냥.” 정복희씨가 반론을 내놨다. “세우면서 보살이 ‘내년엔 소 잡아 주께유’ 하니까 슨 거래유. 내년엔 소를 잡아야 할텐데….” 김태권씨가 말을 받았다. “소 잡을 수 있게 열심히 해보죠.”
주민들은 올해 말 베트남의 친환경마을을 방문해 견문을 더 넓힐 예정이다. 잊혀지고 사라질 뻔했던 가난한 마을이, 이제 다시 대대로 살아갈 만한 마을로 도약하고 있다.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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