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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26 23:30 수정 : 2008.03.28 15:07

차밭 한가운데 누군가 오래된 풍금을 친다. 그 너머가 오우다방이다. 유성용

[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⑤
오우다방의 김양을 생각하며 매화꽃 지천인 악양 벌판을 달렸지

섬진강 굽이를 내다보는 지리산 하동의 점잖은 마을 악양은 이곳의 유명한 수제 녹차 못잖게 다방이 성업이다. 이 마을 손님 접대의 기본은 다방에서 커피를 시켜주는 일이다. 안주인이 집에서 커피를 타 줄 수도 있지만 그건 다방 커피 배달에 비해 대접의 격조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곳 사내들은 하루에도 커피를 여러 잔 마신다. 그러면 속이 쓰리다. 그래서 이곳에는 ‘물커피’란 것이 있다. 도시 말로는 ‘아메리칸 스타일’이다. 물커피를 시키면 스쿠터를 능숙하게 모는 아가씨가 쟁반에 보온병 둘을 챙겨온다. 하나는 커피, 또 하나는 뜨거운 물. 그래서 커피와 물을 반반 섞어 묽게 대접한다. 외지인들은 이곳 녹차에 환장하지만 악양의 주민들은 이토록 커피문화에 익숙하다.

커피와 물이 반반 ‘아메리칸 스타일’

나는 이십대 후반에 연고도 없이 이곳에 내려와 4년여 살았는데 그때 좋은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오우다방의 김양이었다. 예쁘기로 치면 솔다방의 복실이를 따를 아가씨가 없었다. 복실이는 노란 스쿠터를 타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악양벌판을 허리를 곧추 세운 채 달리는데, 악양면의 젊은 수컷들은 논일 하다가 일제히 고개가 돌아갔다. 그래서 그네는 늘 불려나갔다. 농촌 총각들이 복실이와 커피 한잔 하려면 순번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읍내 삼거리에서 좀더 떨어진 오우다방을 좋아라했다. 윤선도 오우가(五友歌)의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르는 이름 아닌가. “내 버디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

오우다방의 김양을 첨 만난 건 노래방에서였다. 이웃에 사는 한 ‘행님’이 갑자기 노래방으로 나를 불러냈다. 가 보니 동네 행님들과 아가씨들 몇이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나를 챙겨주는 나름의 배려였다. 분위기가 민구하고 낯설었지만, 행님들이 권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때 김양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빠, 서울서 이사 오셨다매? 그럼 우리 외지인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요. 어차피 오래 살아도 외지 것이란 소리밖에 못 들응께.” 접대받는 나보다 김양이 더 취한 듯했다. 나는 오히려 ‘시간값’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양, 올봄에는 나물 캐봤어요?


가끔 동네 행님들이 커피 좀 시켜 보라고 하면 나는 오우다방 김양에게 전화했다. 그래서 김양이 몇 번 집에 왔다. 가끔은 비번인 날 수다도 떨다 가고, 비오면 같이 부침개도 해 먹었다. 그럴 때면 내가 녹차 대접을 했다. 어느 봄날은 계곡에서 그네가 머리 염색하는 걸 도와준 적이 있다. “김양아 너는 머리가 너무 커서 염색약이 좀 모자라겠다야!” “참내, 그래도 내가 복실이보다는 낫지. 복실이가 왜 복실인지 알아? 하도 몸을 막 굴려서 개라는 소리야 그게!”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어 벙 찐 사이, 그네는 말을 딱 끊고는 차가운 물에 머리를 헹궜다. 그러고는 따땃한 바위에 퍼질러 누워 있던 내 옆에서 담배 한 대 피더니 인사도 없이 획 돌아가 버렸다.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하루는 김양이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다 말고 나물 캐는 나를 한참 보더니 이건 뭐냐 그건 뭐냐 조잘조잘 물어댔다. 시골 살면서 나물 이름 하나 모르냐고 구박했더니 자기는 도시 출신이란다. “뭐 해 먹을 거예요?” “글쎄, 밀가루 입혀 튀김이나 해 먹을까?” “맛있겠다.” “먹으려면 너도 좀 캐라.” “난 이제 들어가야지. 언제 나도 나물 캐고 싶다.” 그러더니 또 담배만 한 대 태우고는 다시 스쿠터를 타고 가 버렸다. 그 봄에 난 집을 좀 비우고 한 달여 여기저기 떠돌았다. 돌아와서 오우다방 김양이 악양을 떠났다는 걸 알았다.

올해는 김양 말고 내가 악양 벌판을 달렸다. 매화꽃 속을 스쿠터로 달리는 것과 비교할 만한 기쁨은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눈으로 보고 코로 그 향내를 맡다 보면 자칫 핸들에서 손을 놓아 버릴 것만 같다. 나는 매화꽃 지천인 산길 한쪽에 스쿠터를 세워두고 나물 캐는 한 늙은 여자를 오래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섬진강 은빛 물결이 반짝인다.

“김양, 올봄에는 나물 캐봤어요?”

유성용/ 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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