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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2 19:55 수정 : 2008.04.03 14:46

빈티지 도착증. 김도훈.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입사 최종 면접 때 입고 간 옷은 (패셔너블하게) 올이 빠진 너덜너덜한 검은색 스웨터와 (패셔너블하게) 소매가 닳은 잿빛 재킷이었다. 입사한 뒤 면접을 봤던 선배가 말했다. “면접하러 오는 놈이 중공군 군복 같은 걸 입고 오면 어떡해?” 농담이었지만 과감하게 확대 해석해 보자니 ‘그 따위로 옷을 입고 왔는데 뽑아준 걸 천운으로 생각하라’다. 졸지에 잡지 시장에 뛰어든 문화혁명군 취급을 당했으나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면접의 정석대로라면 댄디한 수트를, 혹은 90년대 대학생처럼 폴로 셔츠와 베이지색 카키바지를 단정하게 맞춰 입고 갔어야 옳다.

하지만 나로서는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는 게 면접의 정석은 아닐지라도 면접의 도리였다. 게다가 일본의 중고 가게에서 산 그 중공군 군복(같은 재킷)은 내가 소유한 가장 정상적인 면접용 의상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목이 늘어난데다 검은색이 바래 거의 보랏빛이 되어버린 80년대 헤비메탈 그룹 T셔츠에 빛바랜 독일 군복 재킷을 맞춰 입은 뒤 ‘아스펜’이라는 리조트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비니를 쓰고 면접 의자에 앉아 있었을 게다. 곱게 말해 빈티지. 면접의원을 위시한 평범한 직장인들 눈에는 ‘빈티’다.

빈티지 혹은 구제에 대한 내 집착은 의류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출장을 다녀와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손에는 이러저러한 쓰레기들이 들려 있기 예사다. 파리 출장을 갔다가 사온 것은 1920년에 만들어졌다는 빈티지 프렌치 불도그 피겨린(도자기 인형)이었다. 무게만 5㎏에 육박하는데다 사기로 만들어 언제 깨질지 모를 그것을 영화노동조합 시위를 찬성한다고 부르짖는 <르몽드>에 둘둘 싸서 한국까지 가져오느라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베를린 출장에서 사온 것은 아무리 봐도 싸구려 장난감 같은 오렌지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60년대산 유리잔 두 개다. 이것 또한 <베를린 차이퉁>에 둘둘 싸매고 깨지지 않게 운반하느라 여행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런던으로 휴가 갔을 때 산 60년대산 뜨개실 모자? 두어 번 쓴 뒤 벽장 속에 묻어뒀다. 이 모든 쓸모없이 오래된 것들을 도착적으로 사모을 때마다 머릿속 어른은 준엄하게 소리를 꽥 지른다. 이것봐, 박물관을 차릴 일이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벼룩시장 물품들을 사모으느니 차라리 돈을 모아 원하던 평면 티브이를 한 대 사는 게 낫지 않아?

내 빈티지 도착증을 프로이트 양반에게 물어봤다면 이렇게 답했으리라. 자네가 빈티지를 사모으는 이유는 모든 것이 순결하던 시절로 돌아가고픈 리비도적 욕망이라네. 일간지 문화면 기사라면 이러저러한 사회학자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 빈티지 애호는 역사의 흔적을 부수고 새것만을 강요하는 대한민국 사회에 반발하는 취향의 저항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산 70년대 덴마크제 빈티지 주전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석을 하는 게 좋을까나. 나무 손잡이가 예쁘게 달려 있는 노란색 주전자는 어린 시절 엄마의 부엌에서나 발견했을 법한 에나멜웨어(법랑 그릇)다. 아름다운 광택을 내려고 쓰는 에나멜은 카드뮴을 내뿜는다. 알다시피 카드뮴은 철분결핍성 빈혈, 동맥경화증, 폐기종, 만성기관지염, 혹은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건 혹시 건강식품 강요하는 보신/몸짱 열풍 시대에 반발하고픈 무의식적 저항정신?

김도훈 〈씨네2〉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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