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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2 22:16 수정 : 2008.04.02 22:16

바쿰, 또는 사이폰은 기묘한 실험실의 분위기에 젖게 한다. 사진 이명석.

[매거진 Esc] 이명석의 카페정키

모퉁이를 돌아 두 블록쯤 걸어가면 반지하로 내려가는 파란 계단이 보일 걸세. 저녁 무렵이면 묘한 각도의 태양광이 시선을 방해할 테니,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게. 흘려보낼 수 없는 향기가 자네의 발을 잡아당길 거야. 이윽고 유리문 안으로 발을 들이면, 방안 가득 수증기를 뿜어내는 유리병들, 드르륵대며 이빨을 가는 작은 악마들, 지옥에서 밀수해 온 듯한 육중한 기계들을 만날 걸세. 지상의 인간들은 이 연금술사의 방을 카페라고 부른다더구먼.

커피는 지상에서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을 에티오피아 고원의 빨간 열매로 은둔해 왔다. 지난 수백 년간 승려, 상인, 의사, 과학자들은 굽고 부수고 끓이고 우려내는 실험을 거듭하며, 이 자그마한 콩을 신비한 각성의 음료로 변신시켰다. 지금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 직후에도 나는 주술사의 의식이나 외과의사의 집도와도 같은 과정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 내가 카페를 채운 온갖 도구들에 적지 않은 페티시즘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암동의 ‘클럽 에스프레소’에서는 아랍 전통에 가까운 터키식 커피포트, 제즈베(Cezve)를 만날 수 있다. 아주 가늘게 간 커피를 넣고 끓이는 이 도구는 학교 앞의 ‘뽑기’를 연상하게 할 만큼 소박하다. ‘프렌치 프레스’는 커피 몇 잔을 꾹 찍어내는 느낌인데, 요즘은 가정에서 차를 우리는 데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코펜하겐의 주방기구 회사 ‘보덤’이 이 도구를 대중화하기 전에 프랑스령에 널리 퍼진 게 베트남 스타일의 커피포트. 작지만 여러 부속으로 나뉘어 아기자기한 재미를 준다.

커피를 증기압으로 추출하는 도구에 이르러서야 진짜 기계를 만나는 느낌이다. 초창기 머신 중에는 증기기관차와 같은 모양을 하고 커피를 뽑아내는 종류도 있었다. 모카 포트나 나폴리 스타일의 포트는 작지만 신비로운 능력으로 알라딘의 램프 같은 느낌을 준다. 전자동의 머신이 주는 산뜻함도 좋지만, 굵직한 수동 레버가 천천히 올라가는 ‘닥터 로빈’의 복고풍 에스프레소 머신은 기다리는 재미가 다르다. 아무래도 연금술의 분위기에 가장 어울리는 도구는 알코올 램프의 불로 작은 유리관의 물을 뿜어 올리는 사이폰이겠지?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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