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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02 22:19 수정 : 2008.04.05 14:06

오~ 철사줄 파스타 다이어트엔 딱이라네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이탈리아 국도변의 허름한 기사식당에서 스파게티의 원형을 발견하다

알다시피 한국에서 기사식당은 ‘맛있고 싼 식당’을 의미한다. 물론 여전히 택시나 화물차 같은 기사들이 자주 이용하는 식당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탈리아에도 기사식당이 있다. 시칠리아의 괴짜 주방장 주세페와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종종 들르던 곳이다. 버섯을 사러 활화산 에트나에 오르거나,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사러 대형 재래시장에 갈 때도 이집에서 꼭 밥을 먹었다. 별다른 메뉴도 없었다. 장작에 구운 닭, 몇 가지 파스타와 전채 요리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주세페가 이 집을 단골 삼아 들르는 이유는 그저 국도 변에 있어 요기하기가 만만해서인 줄 알았다.

40년 단골 웨이터와의 길고 긴 포옹

그런데 알고 보니 자그마치 40년 단골이다. 주세페의 선친 대부터 계산하면 그 세월을 훌쩍 넘어선다. 주세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고, 지금 주세페가 사는 시칠리아의 시골 당 책임자였다고 한다. 당연히 각종 회합 때문에 다른 도시를 들를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이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하곤 했단다. 은퇴하고도 한참은 지났을 만한 늙은 웨이터가 주세페를 보고 반가워했다. 아버지의 친구란다. 그 웨이터는 50년을 한결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가 주세페를 발견할 때 마침 다른 테이블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스파게티를 가득 담은 큰 쟁반을 대충 손님상에 내려놓고는 주세페에게 달려왔다. ‘달려’왔다는 것은, 그의 태도였지 실체적 속도는 아니었다. 그가 주세페와 포옹을 하는 데는 수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반가워서 상체는 이미 문 쪽에 있는 주세페에게 기울어져 있었지만, 다리가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주세페는 참을성 있게 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버지 친구에 대한 예의 같았다. 그러고는 긴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각자의 아내, 아들과 딸, 숙부와 숙모, 당숙의 안부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찌는 듯한 날씨 얘기에 엿을 각자 먹이고서야 안부인사가 끝났다. 하릴없이 그 안부 세리머니를 지켜보며 물만 홀짝이던 내가 물었다.

“오랜만에 만났나 봐요?” “으응 … 지난주에 양고기 사러 왔을 때 봤지.”

역시 참을성 있는 기사식당의 손님은 그제야 스파게티 시중을 받을 수 있었지만, 별 불평은 하지 않았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시칠리아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50년 일한 웨이터에게 해고 통지를 날리지 않는 주인도 노인 공경 사상이 투철한 건 아니었다. 이 노인네가 없으면 식당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무시로 드나드는 수많은 트럭 운전사들의 식성까지도 줄줄이 꿰는 진짜배기 웨이터였기 때문이다. 팔뚝에 촌스럽게 오렌지와 일장기 문신을 그려 넣은 무시무시한 인상의 트럭기사도 그에게는 고분고분하게 눈웃음을 쳤다. 웨이터는 닭다리를 맛있게 뜯는 그 기사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했다.

“술 좀 그만 마셔.” “아이고, 무슨 말씀. 와인 없이 어떻게 밥을 먹느냐 말이오?” “그게 아니고, 자네는 와인을 마시려고 닭을 먹고 있잖아.”

종종 시칠리아 국도 변의 트럭들이 여덟 팔자 운행을 하는 건 이처럼 와인과 음식이 맛있는 기사식당이 곳곳에 깔렸기 때문일 게다.

나는 이 식당에서 스파게티의 원형을 보았다. 말하자면 ‘알 덴테’(면을 꼬들꼬들하게 삶는 것)의 참맛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 돈으로 치면 고작 3천원을 받는 스파게티에 들어간 것이라곤 올리브기름과 마늘이 전부였다. 얼마나 오래 썼는지 이빨이 빠지고 누렇게 변색된 접시에 흥건할 정도로 담긴 뜨거운 올리브기름이 인상적이다. 국수를 먹는 건지, 올리브기름을 먹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 기름에 손으로 눌러 으깬 서너 쪽의 마늘이 까맣게 구워진 채 그대로 서비스된다. 웬만한 이탈리아 식당에서는 이 마늘을 접시에 담지 않는다. 향만 우리고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식당은 그것마저도 번거로운 일이라는 듯, 그대로 접시에 담겨 있었다. 식당 안은 닭 굽는 냄새와 타는 마늘 향으로 코가 매캐할 지경이다.

반죽해 뽑은 생면을 햇볕에 말리던 시절도


‘알덴테’로 익혀야 파스타의 참 맛을 알 수 있다.
바싹 마른, 지금 우리가 먹는 스파게티는 이제 이탈리아 전국에서 먹는 파스타이지만, 원래 100년 전만 해도 몇몇 지방에서만 먹었다.

옛날 스파게티는 밀가루를 일일이 손으로 반죽하여 뽑아내는 생면 형태였다. 대량 생산과 보관을 할 수 있는 마른 파스타는 나폴리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시칠리아와 제노바에도 퍼졌다. 이탈리아 안에서도 습기가 적은, 건조한 지방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즘 파스타 공장은 반죽하여 뽑아낸 파스타를 곧바로 기계로 말리지만, 과거에는 태양열에 자연 건조를 해야 했다. 마치 우리 국숫집에서 발에 국수를 널어 말리듯이 말이다. 이런 광경이 나폴리, 시칠리아에서 벌어졌다. 이곳에서도 아이들이 간식으로 국수 건조대에서 그 짭짤한 국수를 훔쳐 먹었을까.

마른 파스타는 기계로 생산하기 때문에 그만큼 값도 싸서 서민들에게 인기였다. 요즘도 마른 파스타의 대표 격인 스파게티와 펜네는 가난한 남부 지방에서 많이 먹는다. 먹고살 만해진 60년대 이후로 요리법이 많이 발달했지만, 스파게티는 본디 요리법이 몹시 단순하다. 게다가 들어가는 재료도 간단하니, 돈 없는 남부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파스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알 덴테’라는 말은 스파게티, 엄밀히 말해서 나폴리에서 시작된 마카로니에서 처음으로 쓰였다. 이제 한국 사람도 알 만큼 국제적인 용어가 됐다. 푹 삶는 국수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알 덴테에 상당히 거부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방식, 요리법까지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때는 이유가 있다. 알 덴테로 삶으면 우선 소화에 도움이 된다. 된밥과 진밥의 차이와 같다. 진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화 기능이 떨어진다. 충분히 씹지 않아 침 분비가 적기 때문이다. 알 덴테는 꼭꼭 씹어 삼켜야 하기 때문에 소화를 돕는 침이 충분히 나온다. 알 덴테의 부수적인 효과는 다이어트에 좋다는 점이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니 포만감이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여자들이 날씬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주방장 할머니가 삶아온 50년의 맛

얘기가 너무 ‘딱딱’해졌다. 다시 기사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자. 검고 딱딱한 시칠리아식 전통 빵을 씹으며 스파게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 웨이터가 음식을 날라왔다. 그런데 거의 철사줄을 방불케 하는 면이 나왔다. 너무 뻣뻣해서 포크에 돌돌 말리지 않을 지경이다. 주세페가 웃는다. 그는 ‘이것이 진짜 스파게티’라고 말한다.

값을 치르고 나서는데 주세페가 낡은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와 반갑게 포옹을 한다. 놀랍게도 그 할머니는 우리가 먹었던 스파게티를 삶았던 주방장이었다. 나이 스물 시절부터 50년 가량을 똑같은 맛의 스파게티를 삶아 내 오고 서비스하는 늙은 웨이터와 주방장은 부부였다. 내 마음이 훈훈해진 것은 식사에 곁들였던 포도주 한 잔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박찬일 뚜또베네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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