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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6 21:27 수정 : 2008.04.16 21:27

페도라 응급처치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머리가 찢어졌다. 다음날 아침 취재를 위해 주섬주섬 물건들을 챙기다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눈앞에서 빅뱅이 펼쳐지더니 두부에서 용암이 샘솟는 듯했다. 2~3분간 혼절해 누워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머리를 감쌌던 손바닥이 온통 피범벅이다. 담배연기를 제거하려고 열어뒀던 육중한 프로젝트창의 모서리에 오른쪽 머리를 냅따 찍어버린 것이다.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옷을 주워 입고 택시를 불렀다. “아저씨, 가까운 응급실로 급히 가주세요.” 택시는 강북삼성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로 들어섰더니 바닥이 온통 피바다다. 얻어맞은 게 분명한 고등학생 하나가 피 멍울이 맺힌 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엄마로 추정되는 중년 아주머니는 응급실 접수원과 금액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응급실 요금이 그렇게 비싼가? 삼성이라 다른 데보다 고급인 건가? 역시 이런 데는 엄마랑 같이 와야 하나? 실랑이를 지켜보며 맘 졸이고 있으려니 접수원이 묻는다. “혹시 누구한테 맞으신 건 아니죠?” 제가 쌈질이나 하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라고 말하려다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서 혼자 다쳤습니다.” 아차, 차라리 쌈질이라고 말했으면 근사하기라도 했겠다. 피 묻은 거즈로 머리를 누른 손가락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간다.

제법 의사처럼 보일락 말락 한 인턴 둘이 머리에 식염수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찢어졌단다. 상처를 손가락으로 지긋이 벌리더니 말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두피가 두꺼워서 뼈는 문제가 없네요. 구역질이나 어지럼증은 없으세요? 머리를 다치시면 모르는 사이에 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시티(CT) 촬영을 하시는 게 좋아요.” 물론 어지럽다. 머리를 다쳐서가 아니다. 아닌밤중에 응급실 형광등 아래에 누워 식염수 세례를 받고 있는 꼴이 처량해서다. 게다가 찢어진 상처보다 더 끔찍한 건 봉합을 위해서 상처 부위의 머리칼을 면도기로 밀어야 한다는 거다. 몇 번의 실패로 겨우 찾은 헤어스타일이다. 이걸 포기하고 빡빡 민 머리로 봄을 맞이해야 한다고? 동생뻘도 안 되는 인턴이 머리를 슥슥 밀며 웃는다. “수염 기르신 걸 보니까 아주 멋쟁이시네요. 머리는 금방 자라잖아요. 밀어도 어울리실 것 같네요.”

수술복을 입고 달려온 레지던트가 상처를 수술용 스테이플러로 쾅!쾅!쾅! 박았다. “일주일간 머리는 감으시면 안 됩니다”. 이것 또한 날벼락이다. 스테이플러 알을 박은 떡진 머리로 출근하는 게 어디 직장인의 도리인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픈 것도 잊고 황급히 옷장을 뒤졌다. 유행 지난 메시캡과 야구모자가 전부다. 이런 걸 쓰고 일주일을 버티라고? 머리에 박힌 스테이플러 알을 매만지며 인터넷 쇼핑몰로 들어갔다.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오다기리 조와 빅뱅이 망쳐놓은 이 시대 쇼핑몰 모델들의 스타일에 혀를 차며 쇼핑몰 순례를 마친 뒤 장바구니에 들어온 건 모직으로 된 검은색 페도라(챙이 있는 모자의 일종)와 밀짚으로 촘촘히 짠 페도라다. 요란한 장식 없는 질 좋은 페도라라면 붕대보다는 훨 나은 응급처치 패션 아이템이 되어줄 거다.

하지만 진짜로 필요한 건 페도라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응급상황 타개를 위한 온라인 쇼핑 도우미가 되어준 패션지 에디터가 메신저로 말했다. “그나저나 너무 무서워. 독거노인들이 양로원에 모여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 우리도 모여서 살까? 자기 오피스텔 위아래층에 빈 방 생기면 연락 좀 줘.” 과연 싱글라이프는 더블라이프로 가는 지난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한 걸까.

김도훈〈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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