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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6 22:23 수정 : 2008.04.17 13:50

묵호동 달동네에 오르는 길은 덕장길이다. 볕 좋고 바람 좋아 명태가 가득 널린단다. 유성용

[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⑥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 들어서면, 바닷가 언덕 위에 촘촘히 박힌 달동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 출신 후배에게 물으니 막상 자기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단다. 후배의 부모님은 시내에서 약국을 하시는데 저 동네는 험하고 더러운 동네니 근처에는 얼씬도 말랬다나?

고층 아파트와는 모르고 지낸다고?

스쿠터를 몰고 좁은 산길로 접어드니 작은 집들이 교묘하게 얽혀 급경사를 이룬다. 볕이 막히는 골목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좀 넓은 곳으로 나오면 그때마다 색색의 양철지붕들이 봄볕에 눈부시다. 코흘리개 몇이 똘랑똘랑 가방을 매고 집으로 간다. 한데 어느 놈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몇 발짝 가다가 장난을 하고 또 몇 발짝 가다 장난친다. 흙무덤이 있는 공터가 나오자 아예 가방을 팽개치고 퍼질러 앉아 흙장난을 한다. 너들 집에 가면 누가 있냐. 언놈은 할머니, 언놈은 할아버지란다.


정상에 이르니 구름이 뭉실뭉실하다. 도로 표지판에는 덕장길이라고 쓰여 있다.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으니, 이곳은 볕 좋고 바람 좋아 겨울이면 마을 여기저기 명태가 가득 널린단다. 주변에 쓰레기가 없고 깨끗하다. 산정 외곽으로는 일주도로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작은 집들이 빽빽하다. 한데 그 길 끝에는 신축 고층 아파트도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잘 아는데 그곳 사람들과는 모르고 지낸단다. 배가 고파 분식점에 들어갔더니 모녀가 운영하는 참한 가게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 일을 도와주던 딸은 이제 학업을 마치고 오스트레일리아로 간단다. 미용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어미는 딸이 대견스럽다고 낯선 손님 앞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하얗고 커다란 등대가 서 있는 동쪽 비탈에는 집들이 더욱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어느 집에서나 창문만 열면 바다가 보이겠다. 한전에서 나왔는지 푸른 제복을 입은 개미만한 사람이 홀로 전봇대에 올라 전선작업을 하고 있다. 그 너머로 봄볕 받은 동해의 파란 물이 눈부시다. 이 동네에서 가장 먼저 봄볕에 취한 듯한 사내가 시멘트 길바닥에 엎어져 있다. 낮술 먹었나 보다. 별 탈 없나 곁에 가보니 막걸리 냄새가 확 밀려온다. 한데 하나도 역하지 않다. 이거야말로 봄 냄새로구먼! 사내 얼굴 쪽에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속삭여봤다. 아저씨 집에 가서 주무셔야죠. 그러자 엎어져 있던 사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눕더니 나를 빼꼼히 쳐다본다. 그러고는 따분하다는 듯이 이내 다시 엎어져 잠든다. 캔맥주라도 하나 까지 않을 수 없는 봄날이다.

미나리 실파에 막회 몇 점이 간절하구나

브레이크를 잡으며 덜덜덜 산길을 내려오자니 막연한 봄날에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적힌 ‘딸기다방’이란 간판이 눈에 박힌다. 그 아래는 이런 현수막도 붙어 있다. ‘놀라운 예지력. 운세 사주 마당. 당신의 고민 말끔히 상담’. 희한한 다방이로군. 마담이 무당인가? 스쿠터를 세우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아가씨에게 물으니 창가에 앉은 오십줄 돼 보이는 마담이 봐준단다. 저 여자, 달동네의 고달픈 사정을 퍽이나 들어 이제 거의 보살이겠지만 내 헬멧과 더블백 단봇짐을 흘겨보는 눈빛이 왠지 불편하다.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다방은 파리 날린다. 차라리 상큼한 딸기라도 한 접시 내주면 좋으련만. 나는 커피만 홀짝 마시고 일어났다. 공연히 여기 있다가 마담에게 이런 소리라도 들으면 찜찜하지. “두 바퀴 달린 거 멀리해. 제 명에 못 죽어!” 항구 쪽으로 난 길에는 아지랑이가 오르고 있었다. 나는 스쿠터에 몸을 싣고 두리번거린다. 이렇게 졸리운 봄날이면 알싸한 초고추장에 회 한 점 간절하다. 생무를 채 썰고 미나리 실파, 그리고 많이도 말고 잡어들을 함부로 썬 막회 몇 점. 이 동네서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초고추장에 매실은 넣어줘야 하리. 황사로 바짝 마른 입속에 한 젓가락 하면 매콤한 생강나무 노란 꽃들 눈앞에서 반짝이게.

이쯤에서 모퉁이 돌면, 찬물 흘러넘치는 양철 대야에 생파 헹구는 작고 예쁜 손이 보일 듯도 싶다.

유성용 여행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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