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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의 주무대인 주펀. 좁은 골목과 가파른 계단이 이어졌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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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필름의 거리 ② 주펀
아름답고 잔인했던 <비정성시>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
몇 해 전 허우 샤오셴 감독과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촬영감독 마크 리 핑빙을 인터뷰했다. 그는 허우 샤오셴이 항상 촬영 장소에 먼저 도착해 그곳에서 느낀 감흥들로 만든 ‘즉석콘티’를 건네 긴장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허우 샤오셴에게 촬영지는 단순히 장소가 아닌, 작품을 구상하고 담아낼 가장 중요한 감정의 그릇이었다. 대만에서 나고 자라 그 풍광 속에 대만인의 삶을 기록한 감독 허우 샤오셴. 그의 대표작 <비정성시>는 이런 대만을 가장 잘 포착한 작품이다. 영화의 주 무대가 된 ‘주펀’에서 그는 어떤 감흥을 전달받았을까. 문득 그의 카메라를 따라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영화 <비정성시>는 1945년 일제 치하 해방 이후 국민당 정부의 정착까지, 대만의 한 평범한 가족이 겪는 아픔을 통해 대만 질곡의 현대사를 그린 작품이다. 식당을 하는 임아록. 정치·사회적인 격변 속에 그의 네 아들은 실종되고, 죽고, 미쳐 간다. 아픈 역사는 양조위가 연기하는 청각장애인 막내아들 문청의 눈으로, 그의 아내 관미의 내레이션으로 차분히 기록된다. 주펀은 바로 사진사 문청이 일하던 사진관이 있던 곳이다. 암울한 시대를 대변하듯 내내 흐렸던 주펀의 하늘, 가파르게 이어지는 좁은 계단, 그리고 그 끝에 이 모든 아픔에 무관한 듯 펼쳐져 있던 바다. 영화 속 주펀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래서 잔인했다.
주펀으로 가는 길은 비교적 쉽다. 타이베이에서 교외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에 있는 루이팡역. 그 짧은 이동으로 거리는 도심의 혼잡을 말끔히 벗고 자연의 충만함을 내어준다. 산 중턱에 위치한 주펀으로 가려면 역 앞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바다를 낀 구불구불한 산길. 눈앞에 펼쳐진 진풍경에 탄성이 앞선다. 영화 속 관미가 처음 이곳에 와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자주 보게 돼서 좋았다”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길의 처음은 고풍스런 상점 거리 ‘지산제’다. 대만 대표 먹거리인 ‘썩은 두부’(취두부) 냄새를 뒤로한 채 좁은 골목을 따라가면 곧 <비정성시>의 가파른 계단 길 ‘수치루’를 만난다. 영화 속 젊은 지식인들이 매일 저녁 모여 시대를 탄식했던 곳, 홍등 아래 선술집이 늘어서 있던 ‘슬픔을 간직한 도시’는 지금 대부분 관광객들을 위한 전통 찻집과 기념품점으로 바뀌었다.
관광객들의 바쁜 재잘거림 속, 나도 따라 계단을 밟아 본다. 계단 중턱, <비정성시>의 촬영지로 소개된 찻집 ‘아미차관’에 들러 자리를 잡았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이쯤이었으리라. 잔뜩 구부린 채 필름의 흠집을 수정하던 문청이 떠오른다. 느리고 꼼꼼하던 그의 손동작. 문청은 그렇게라도 아픈 현실을 수정하고 싶었으리라. 허우 샤오셴은 북경어를 모르는 양조위를 위해 문청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 동포를 죽이는 총소리도 듣지 못한 문청에게, 장애는 현실을 이겨낼 절실한 방패였는지 모른다. 주펀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깨끗한 렌즈, 문청의 맑은 눈을 통해 본 주펀은 이처럼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한 허우 샤오셴의 따뜻한 위로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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