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상 입고 스트립쇼까지 쿠스쿠스의 질긴 트라우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아프리카식 노란 좁쌀 같은 알갱이 …주방에서 학을 떼고 다신 안 만든다네 고백건대, 내가 시칠리아까지 흘러간 것은 <지중해> <시네마천국> <일 포스티노> 같은 영화들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널럴’하고 유쾌한 동네일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고, 게다가 그 사람들이 재밌기까지 할 거라고 제멋대로 상상했던 까닭이었다. 물론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종종 재미를 넘어 지나치게 엉뚱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쾌속으로 달리면 두 시간 지중해 지도를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중해라고 해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라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고슬라비아’ 같은 동유럽 나라도 엄연히 지중해에 옆구리를 적시고 있다. 아시아 나라도 빠지지 않는다.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지중해 짠물에 혀를 담그고 있는 거다. 아프리카도 뺄 수 없다. 모로코·알제리·수단·리비아야말로 원조 지중해가 아니냔 말이다. 그렇다. 아프리카! 내가 일하던 시골 식당 ‘파토리아 델레 토리’는 이탈리아에서도 시칠리아에 있다. 그런데 수도 로마보다 아프리카가 더 가깝다. 저 북부의 잘난 이탈리아 사람들이 ‘시칠리아는 아프리카다’ 하는 비아냥거림이 옳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랑 가까운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쾌속정을 띄운다면 두어 시간에 아프리카 어디든 도착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아프리카 무어인을 닮은 이들도 눈에 띈다. 음식도 닮았다. ‘파토리아 델레 토리’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식당은 대부분 아프리카식 요리인 ‘쿠스쿠스’를 요리한다. 파스타 같기도 하고, 우리 식으로 하면 무슨 ‘범벅’요리 같기도 하다. 좁쌀처럼 생긴 밀가루 가공품인데, 이게 여간 까다롭지 않다. 대충 익히면 까칠하고, 너무 익히면 푸석푸석해진다. 그래서 이 요리를 하자면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다. 또한 쿠스쿠스 하면 시칠리아를 떠올리는 마당에 대충 요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엄마들이 된장찌개 하나는 제대로 끓이려고 애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쿠스쿠스는 먼저 좁쌀처럼 생긴 알갱이를 잘 삶아야 한다. 그러고는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여러 가지 채소와 해물, 고기 따위를 익힌 후 미리 삶은 쿠스쿠스 알갱이와 한데 버무려 내야 한다. 올리브유에 마늘 타는 냄새와 수컷들의 땀냄새, 지중해 바다냄새까지 뒤섞이는 바쁜 저녁시간에는 북새통이 벌어진다. 그럴 때면 꼭 까다로운 손님의 불평이 쏟아진다. 일종의 주방 징크스다. 재료가 떨어진 요리만 주문이 빗발치는 것처럼 말이다. “골파 대신 대파를 넣어 달라, 양파는 빼고 샬롯으로 향을 내 달라 ….” 아니, 다 같은 파잖아! 종의 다양성이고 뭐고, 웬 파가 그렇게 종류가 많으냐고. 맥도널드에서도 ‘케첩은 빼고 양파는 익힌 것으로 넣고 오이피클은 조금만 넣어 달라’고 천연덕스럽게 요구하는 나라에서 이런 주문을 거부할 도리도 없다. 사고는 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생긴다. 꼭 무어인처럼 생긴 요리사 잔니가 ‘대파와 샬롯!’을 외치며 냉장고로 뛰어가다가 그만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불판 옆 바닥에는 올리브유와 미끈거리는 스파게티 가락들, 그리고 장어껍질처럼 미끄럽지만 정체는 알 수 없는 ‘무엇’이 툭툭 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미끄럼 방지 신발을 신었지만 이럴 때는 도리가 없다. 그가 넘어지면서 엉겁결에 내 팔을 붙들었다. 맙소사! 내 팔은 마침 파스타 솥에서 꺼낸 뜨끈뜨끈한 쿠스쿠스 냄비를 붙들고 있었으니. “케 칼도 카초!”(앗 뜨거 빌어먹을! 이럴 때 이탈리아어가 튀어나온다면 진짜 이탈리아 사람이 다 된 걸 테지?) 커다란 쿠스쿠스 한 냄비가 왈칵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 가슴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필 덥다고 단추는 풀어놓았을 게 뭐람. 그러니까, 쿠스쿠스가 접시 대신 내 몸을 고른 것이다! 초짜들에게 인생 교훈을 던지는 튀김솥
![]() |
주방장 주세페가 쿠스쿠스를 만들고 있다.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