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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23 22:51 수정 : 2008.04.23 22:51

앤티크 소품으로 매달려 있는 핸드 밀이 아까울 따름이다.

[매거진 Esc]이명석의 카페정키

‘나의 아침을 깨우는 한잔의 커피 ….’ 신춘문예 후보작에 이런 글귀가 있다면, 빨리 떨어뜨려 달라고 발버둥치는 것과 같은 지독한 상투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당신은 커피의 어떤 순간에 잠을 깨는가? 쌉싸래한 액체가 혀에 닿을 때? 조금 더 앞이라면, 커피 향이 주방 모퉁이를 돌아올 때? 나는 그전에 깨고 만다. 내 손 안의 그라인더가 끄르륵거릴 때다.

커피를 코로 즐기는 데는 여러 단계가 있다. 원두의 프래그런스, 커피액의 컵 아로마, 마신 뒤 콧속의 애프터 테이스트 …. 그중에서도 신선한 원두를 부술 때 터져 나오는 프레그런스만큼 폭발적인 향기는 없다.

카페에서 하루의 첫잔을 찾는 경우에도 그라인더는 자명종 구실을 한다. 미안하지만 이때는 즐거움보다는 불쾌함 때문이다. 카페에 매혹되어 온갖 소리를 사랑하게 되어도, 그르렁거리는 전동 밀의 굉음만큼은 참 적응이 안 된다. 물론 나는 저 엄격한 바리스타들에게 핸드 밀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고풍스러운 풍모에 열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동 밀의 편리함과 정밀함에 맞서기엔 너무 벅차다.

커피콩은 여러 추출 도구에 따라 제각각의 굵기로 변신해야 한다. 퍼콜레이터나 프렌치 프레스는 아주 거칠게, 융 드리퍼는 중간 정도, 종이 드리퍼나 사이펀은 좀더 가늘게, 모카 포트는 조금 더 가늘게, 에스프레소 머신은 좀더, 터키식 커피는 거의 밀가루 수준으로. 수동 그라인더는 아주 가늘게, 그리고 일정한 굵기로 갈아 주어야 하는 에스프레소 원두용으로는 확실히 역부족이다.

삼청동의 비(B)카페에서는 새 원두를 사면 기한이 살짝 지난 원두를 덤으로 주는 1+1 행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거기에서 200g 두 봉지에 두 봉지를 더 얻어 “갈아 주세요”라고 외치는 아가씨를 목격했다. 나는 당장 쫓아가서 묻고 싶었다. “혹시 혼자 사시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좋은 원두도 갈아 버리면 불과 몇 시간 안에 그 향이 졸렬해진다. 그 아가씨는 10명 이상과 동거하든지, 그라인더를 장만해야 한다. 아니면 출장 핸드 밀 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 나 같은 친구를 사귀든지.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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