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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혁명 만큼이나 근사했던 체 게바라의 수염.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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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수염은 오랜 로망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코밑이 거뭇거뭇한 ‘교실 제일 뒷줄 세계’의 사내놈들과 동급이 되고 싶어 수염을 원했다. 대학 시절에는 패셔너블한 혁명 세력이 되고 싶어 수염을 바랬다. 카스트로도 수염이 있고 체 게바라도 수염이 있었으니 수염 없이 혁명은 불가능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수염을 원한 이유? 파르라니 거친 볼을 번득이며 책상에 앉아 넥타이를 고쳐 매는 근사한 직장인이 되고 싶어서다. 그러나 수염은 폴 스미스의 뿔테 안경도 아니고 트루 릴리전의 스키니 진도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패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일 때가 마침내 온 거다. 오판이었다. 알고보니 세상의 모든 패션은 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였다. 인터넷 검색창에 ‘수염나는 약’을 우연히 쳐넣자 “일제 발모제가 기가 막히다”는 블로그 글들이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에는 효능이 없고 눈썹, 수염, 겨드랑이털, ‘초큼’ 부끄러운 부분의 체모 성장을 촉진시키는 약이라고 한다. 대여섯 달 만에 봄날에 싹트듯 수염이 자란다는 그 약은 유명 연예인들도 저마다 사서 바른다고 했다. 이런 경우 실효는 중요하지 않다. 장XX도 바르고 이XX도 바른다잖아. 게다가 약의 주성분이 메칠테스토스테론과 프리피온산테스토스테론이다. 그게 뭔지는 모른다. 다만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남성 호르몬을 촉진시키는 뭔가가 들어 있는 건 분명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음성적인 경로가 아니고는 그 약을 구할 방도가 없다. 정식으로 처방을 받은 뒤 약국에서 사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선생님, 장XX처럼 수염 좀 나게 해주세요”라고 의사에게 조를 수도 없는 일이다. 일부 미니홈피에서 살 수 있다지만 당연히 불법이다. 일본으로 출장 가는 동료에게 부탁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탁을 받은 동료는 멍하게 약의 이름과 효능이 적힌 쪽지를 바라봤다. “수염 나는 약이라니, 그런 걸 도대체 왜….” 그로부터 매일 밤 그루밍의 절차는 바뀌었다. 세안을 한 뒤 아이크림과 함께 발모제를 바른다. 공략 부위는 턱 주변과 구레나룻이다. 이걸 바른다고 구레나룻이 척 노리스처럼 자랄 리 없지. 하지만 바른 지 두어 달이 지나자 구레나룻 부위의 솜털이 조금씩 굵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보다 훨씬 더 남자다운 남자가 된 기분이다. 회사에 가자마자 물었다. “여기 잘 봐. 구레나룻이 좀 긴 것 같지?”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온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당연한 반응이다. 사람들은 1년 365일 남의 얼굴만 쳐다보며 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내 귀밑 솜털의 미묘한 굵기 따위는 지나가는 개미의 등에 얹혀진 과자 부스러기의 종류만큼이나 구분하기 힘든 마이크로스코프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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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싱글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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