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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07 22:36 수정 : 2008.05.11 10:48

이름 있는 놈들의 엉덩이에 열광하다

[매거진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돼지고기 선호 부위가 정반대인 이탈리아, 한국과 구상무역하면 좋겠구나

“으악!”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가 일하는 ‘겁나 먼’ 시칠리아의 식당 ‘파토리아 델레 토리’의 주방장 주세페가 허연 돼지 반 마리를 어깨에 얹고 주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주세페는 마치 엎어치기 한판을 시도하는 유도 선수처럼 잔뜩 구부린 채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얼른 받게. 빌어먹을 돼지가 내 숨통을 조인다구!” 돼지를 받아 안을 때 하마터면 허리가 꺾일 뻔했다. 엄청나게 큰 돼지였다. 오랫동안 씨돼지 노릇을 했을 것만 같은 덩치에 거의 카리스마까지 느껴졌다. 비록 머리는 잘려나가고 내장은 없는데다 반으로 잘린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런 유기농은 멍청한 유기농이다?

주세페는 뭐든 제대로 된 재료를 골라 쓰는 주방장이었다. 닭 하나를 사더라도 부리에 윤기가 있는지(이탈리아의 닭은 머리가 달린 채로 팔린다), 제대로 뛰어다니면서 사육되어 다리가 단단한지 꾹꾹 눌러봤다. 그는 유기농의 개념에는 무신경했다. 오히려 그 의미를 뛰어넘는, ‘원래’ 하던 방식으로 만든 먹거리를 찾아내는 데 온 신경을 바쳤다.

“유기농의 의미도 이미 퇴색했어. 도시 사람들이 저 한 몸 건강하게 살자고 농약이며 항생제 따져서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이 아니지. 그 사람들은 유기농조차도 벌레 먹었다고 항의를 하는 멍청이들이니까.” 그는 유기농이니, 뭐니 거창한 개념보다 오랫동안 시칠리아 땅에서 재배하고 기르던 방식을 고수하려고 했다.

“로베르토, 먼 바다를 건너서 온 유기농 농산물이 진정한 의미의 유기농일까? 생각해봐. 비록 기를 때는 유기농일지 몰라도 기름을 펑펑 쓰면서 물을 건넜는데도?” 그는 또 기업적으로 만들거나 하우스 재배한 유기농도 배척했다. 땅 주인인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농산물이나 가축은 공장 생산품이며, 하우스 재배에 들어가는 기름을 저주했다. 그는 하우스에서 재배한 오이를 들고 내게 말했다.

“이것 보라고. 한겨울에 웬 오이야? 이게 오이로 보여? 오이 부피보다 몇 배의 기름으로 기른 이것이 오이냐고? 퀘스토 논에 체트리올로!(이건 오이가 아냐!)” 그는 내게 성질을 부렸다. 괜히 내게 핏대야! 그는 한손에 오이를 들고 마구 흔들었다. 오이가 뚝 잘려 주방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보라고. 기름 먹고 자란 오이가 얼마나 힘이 없는지.” 당신 팔뚝 때문이 아니고?

그런 그가 구해온 돼지는 과연 어떤 녀석일까 궁금했다. 이탈리아 역시 돼지는 대개 사료를 먹여 기른다. 기르는 기간도 한국보단 길지만 역시 매우 짧다. 돼지는 보통 100킬로그램이 되면 목이 잘린다. 더 길러봐야 투입되는 사료에 비해 고기의 양이 적기 때문이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사료를 먹여 재빨리 기른 후 잡아버린다. 그래야 ‘남기’ 때문이다. 돼지를 기르는 것이 이미 공장화 단계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돼지를 직접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기르는 ‘농부’ 대신 공장주만 있을 뿐이다.

이러니 돼지가 뭘 먹든, 아니 소가 소를 먹든 말든 그저 살이 빨리 찌면 그만인 것이다. 최소 투입량에 최대 산출량. 우리가 한때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던 효율의 명제였다. 광우병이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로베르토, 돼지가 몇 년을 사는지 알아? 20년은 너끈히 산다고.” 그는 주방 작업대 위에 부려진 돼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은 불과 2년 만에 죽었지.”

몹쓸 것을 먹었을 확률이 적은 ‘티토’

2년 만이라고. 이렇게 큰 돼지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이놈은 큰 돼지라 오래 산 거야. 다른 녀석들은 1년 만에 하직일세. 그때가 딱 고기가 부드럽고 먹은 사료만큼 살이 찌는 한계거든.”

시칠리아 시골도 모든 고기는 정해진 도축장에서 잡아야 한다. 옛날, 마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한가한 1월에 돼지를 잡고 양념을 쳐서 육가공품을 만들던 꿈같은 시절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돼지가 그 돼지인 거야? 그렇다면 까칠한 주세페의 선택이 따로 있었을 것 같았다. 공장에서 생산되지 않은, 그가 진짜 돼지라고 이를 만한 놈 말이다. “이름 있는 돼지를 찾아보게나. 이 녀석도 이름이 있었다고 해.”

유명한 돼지였다는 얘기? 그래, 이놈이 무슨 콩쿠르에서 우승한, 소인지 돼지인지 구별이 안 가는 슈퍼 돼지란 말인가 보다. 그러나 주세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 흔들었다.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듯, 양쪽 어깨를 위로 잔뜩 꼬부리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찔러댔다. 시칠리아인 특유의 제스추어다. “아니아니! 로베르토나 주세페처럼 이름이 있다는 얘길세. 이놈은 토티인가, 토토인가 그랬나 봐.” 토티(Totti)? 축구 선수와 이름이 같다? 그러자 그는 ‘Toti’라고 설명해주었다. 가축 이름으로 흔하다고 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삼겹살을 즐기지 않는다. 사진 박찬일.
그는 말귀가 어두운 나를 한쪽 팔로 감싸 안으며 바짝 얼굴을 갖다댔다. 뭔가 진지한 얘기를 할 때 주세페가 하는 태도였다. 그가 점심에 먹었음에 분명한 기사식당 토종닭의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정말 그 동물을 인간답게 길렀다는 뜻이지. 공장에서 기르는 돼지나 소는 이름이 없어. 그러나 집에서 몇 마리씩 기르는 녀석들은 누구나 이름을 갖지. 그런 돼지나 소에게 몹쓸 것을 먹일 수 있겠나?”

아하, 그는 ‘몹쓸 것’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영국발 광우병 소동이 이탈리아도 위협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에는 안전했지만, 2001년에 이탈리아에도 광우병이 기어이 발병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나 말고기를 먹었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말고기 포장육을 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말고기 등심은 오히려 쇠고기보다 비쌌다. 왠지 근육질이어서 질길 것 같던 말고기였지만, 상상 외로 부드러웠다. 특히 안심은 그야말로 입에 넣으면 녹았다. 각설하고….

주세페는 작업대에 눕힌 돼지를 위해 칼을 갈았다. 짧지만 단단해서 뼈조차 잘라버릴 것처럼 튼튼한 본나이프였다. 그는 왼손으로 돼지 엉덩이 쪽을 짚어가며 근육의 형태를 가늠했다. 그리곤 칼을 깊게 엉덩이선을 따라 찔러나갔다.

“쿨로(엉덩이)! 비록 지금은 냄새나는 쿨로지만 소금을 쳐 서늘한 곳에서 말리면 최고로 비싼 프로슈토가 된다네.” 프로슈토는 정말 모두들 좋아하는 돼지가공품이었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먹는 수입품이 됐다. 프로슈토는 엉덩이를 2주 정도 소금에 절였다가 바람이 잘 통하고 습도가 적당한 산간지방의 창고 속에서 서너 달 이상 말리면 완성된다.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생햄인데, 칼로 얇게 저며 먹으면 기막힌 맛이다. 오랜 시간동안 소금과 고기의 아미노산이 분해되면서 특유의 짭조름하고 숙성된 맛을 낸다.

잡다한 부위들은 그러모아 소시지로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돼지 엉덩이, 즉 뒷다리가 가장 싸고 안심도 등심도 거의 헐값이다. 오죽하면 양돈가협회에서 큰돈을 들여 이 부위의 소비를 촉진하는 텔레비전 광고까지 할까. 반면 삼겹살은 웬만한 쇠고기 값이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정반대다. 뒷다리는 당연히 프로슈토를 만드니까 비싸다. 등심과 안심도 쇠고기의 그것과 같다. 이네들은 돼지 스테이크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겹살은 고기 취급을 안 한다. 요리할 때 앙념으로나 쓰는 ‘기름’ 대우를 한다. 1킬로그램에 3천원이면 살 수 있다. 나는 당시, 두 나라가 구상무역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어쨌든 삼겹살은 수입이 된다.

주세페는 돼지 뒷다리를 냉장고에 넣고 스테이크 감을 정리한 뒤 잡다한 부위들을 그러모았다. 자, 살라미를 만들 시간이다. 이탈리아 소시지 살라미!

박찬일 뚜또베네 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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