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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주인의 취향이 정말 예민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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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 서진의 뉴욕 서점 순례 2
비영리 중고서점 ‘하우징 웍스’와 인디만화로 채워진 ‘자이언트 로봇’
지난 줄거리 : 7년차 편집자인 이선제는 뉴욕에서 행방불명이 된 서진씨를 찾아 뉴욕으로 간다. 그를 찾아나선 곳은 뉴욕의 서점. 100군데가 넘은 서점을 단 일주일의 휴가기간에 뒤져서 서진씨를 찾아야만 하는데, 첫날에는 가장 큰 서점 체인인 반스 앤 노블과, 가장 큰 중고서점인 스트랜드 북스토어를 들렀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채로, 첫날에 무리를 해서인지 일찍 잠이 들어 버렸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생전 처음 가 본 서점에 멍하니 서 있었다. 책장이 원형으로 에워싸고 있고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천장이 높았다. 곳곳에 사다리가 놓여서 책장 높은 곳까지 책을 꺼내올 수 있었지만 과연 그 높은 곳에 어떤 책이 있는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릴 정도다. 나는 ‘픽션’(허구)이라고 팻말이 붙여진 서가에 다가간다. 그곳에 검은머리를 한 점원이 서가의 먼지를 툭툭 털고 있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 사람이 서진씨라는 것을 알았다. 원래 꿈에서는 근거 없는 확신이 통한다. 나는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무슨 책을 찾고 계신가요?”
“북 원더러(Book Wanderer)라는 책을 찾고 있는데요. 저자는 서진입니다. 한국 작가예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튀어 나와 버렸다. 원래 꿈속에서는 맘대로 말이 튀어나온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머리높이의 서가에서 검은 표지 책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슬로 모션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겁하게, 어딜 숨어 다니는 거예요, 글이 잘 안 써지면 나하고 의논하면 되잖아!’ 하고 외치려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이 내리 쬐었다. 가까스로 눈을 뜨니 나는 뉴욕의 한 호텔방에서 막 깨어난 참이었다. 아차, 벌써 10시가 넘었다. 나는 로봇처럼 벌떡 일어났다. 이스트 빌리지의 서점을 돌 차례다. 오늘도 가야만 하는 서점이 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할 겨를이 없다.
‘스마트한 사람들’은 무엇을 보는가
Day 2. 이스트 빌리지 세인트 마크 북숍(St. Mark Boo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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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마크 북숍에서 6년째 일하는 크리스틴. “대부분 손님이 단골이라 일하기 편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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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빌리지는 작고 독특한 음식점과 가게로 가득하다. 예전에는 보헤미안과 정키들이 들끓는 위험한 동네였다지만 지금은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과 학생, 그리고 예술가가 대부분이다. 근처에는 작고 아담한 카페와 음식점, 옷가게 등이 즐비하다. 상업화되기 전 홍대 주변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이 동네 가운데짬에 있는 세인트 마크 북숍에 들렀다. 서진씨가 가장 좋아한다는 서점이기도 하다. 서점 입구에는 근처에서 열리는 전시와 낭독회, 행사 등을 알리는 메모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세인트 마크 북숍은 사다리꼴 모양의 내부가 50~60평 정도 되는 아담한 서점이다. 1977년에 문을 열 당시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에 있어서 세인트 마크 북숍이 되었지만, 현재는 9번가 모퉁이에 자리를 틀었다. 이곳엔 돈과 관련된 컴퓨터·비즈니스 관련 책을 제외한 예술·문학·전기·잡지 등이 고루 갖춰졌다. 특히 시중에서 보기 어려운 수입 잡지와 사진·미술 관련 책이 눈에 띈다. 그리고 신간이나 주목할 만한 책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보면 서점 주인의 취향이 굉장히 예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가를 한번 죽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요즘 ‘스마트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작가나 작품이 어떤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무슨 도움이라도 필요하신가요?”
카운터의 여자 점원이 말을 건넨다. 반즈 앤 노블이나 스트랜드에서는 직원이 먼저 절대로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는 검은 뿔테에 초록색 원피스를 입었고 서점 점원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망사 스타킹을 신었다. 나는 그에게 명함과 서진씨의 사진을 건네며 혹시 이런 사람을 봤느냐고 묻는다.
“물론 알죠. 음 … 이틀 전에도 왔는데. 이상한 질문을 하더군요. 세상의 모든 책이 불타 버린다면 그 중에 어떤 세 권의 책을 구하겠느냐고요.”
무슨 뚱딴지 같이 세상의 모든 책이 불탄다는 이야긴가? 혹시 쓰고 있는 소설, ‘북 원더러’의 설정인가? 크리스틴은 6년째 이곳에서 일하는 중이란다.
“다른 서점에서도 일했지만 이곳이 제일 좋아요. 대부분의 손님들이 단골이라 정이 들기도 하고요. 당신 친구는 지난번에 들러서 주놋 디아즈의 책 한 권(The Brief Wondrous Life of Of Oscar Wao)을 샀어요. 제가 추천해 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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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마크 북숍엔 돈과 관련된 컴퓨터·비즈니스 책이 많지 않다. 대부분 예술·문학·전기·잡지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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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산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책을 선택하느냐는 개인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서점에서 어떤 책이 눈에 띄고, 점원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느냐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아마도 이곳의 단골손님들이 인터넷이나 대형서점에서 책을 주문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다. 잡지서가에서 몇 권(The Believers, N+9, SWINDLE)을 집어 들었다. 이런 잡지는 안 사고는 베길 수가 없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 짐 무게가 점점 걱정됐다. 크리스틴에게 그를 다시 보면 꼭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점을 나섰다. 31 Third Avenue, stmarksbookshop.com
기증받은 책이라 들쑥날쑥하리라
하우징 웍스 중고 서점 카페 (Housing Works Used Book Cafe)
하우징 웍스(Housing Works)는 에이즈에 걸린 뉴욕의 홈리스를 돕고자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다. 그 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서점인 이곳에는 기증받은 책을 싼값에 판다. 복층구조로 시원하게 뚫린 이곳은 고풍스런 도서관처럼 느껴진다. 100평 정도 되는 공간에 마호가니 패널로 만들어진 발코니가 나선형 계단으로 연결되었고, 곳곳에 편안한 의자와 카페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원봉사자들이다. 나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가 버려서 치킨 랩도 하나 집어 들었다. 20~3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거나 컴퓨터로 작업을 한다.
서점은 이스트 빌리지의 맨 아래, 소호의 오른쪽 끝, 차이나타운이 시작되기 전의 애매한 곳에 걸쳐 있다. 그 어느 곳에서 길을 잃거나 다리가 아프게 되면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쉴 것이다. 하우징 웍스에서 책을 사고, 차 한 잔을 마시는 것 자체가 누군가를 돕는 일이니까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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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징 웍스는 원래 뉴욕의 홈리스를 돕는 구호 단체에서 출발햇다. 복층구조로 시원하게 뚫려 고풍스런 도서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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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거리를 헤매다 발이 아프면 하우징 웍스에 가서 쉬어도 좋다. 책을 사고 차 한 잔 마시는 게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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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는 의외로 다양한 종류의 책이 구비됐다. 기증받은 책이라 들쑥날쑥 하기는 하지만 역사·정치·문학·요리·예술 분야, 심지에 중고 시디와 엘피(LP)까지 정가의 반값 이하로 살 수 있다. 어쩌면 서진씨는 이곳에서 책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가 기증한 오래된 그 책을 우연히 발견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곳의 책은 컴퓨터로 검색이 되지 않는다. 매일 와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서진씨도 이곳에 매일 드나들며 그 책을 찾을지도 모른다. 126 Crosby St, housingworks.org/usedbookcafe
캐릭터 티셔츠와 인형도 짭짤
자이언트 로봇 (Giant Rob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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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가게 같은 외관의 자이언트 로봇. 인디 만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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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장난감 가게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다른 서점에서 볼 수 없는 책들이 수북하다. 미국의 인디 만화, 그것도 미술적으로 탁월하고 이야기 구조도 훌륭한 만화책 말이다. 자이언트 로봇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일본인 2세 에릭 나카무라와 마틴 옹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아시아 문화 잡지다. 인디 잡지가 그렇듯, 힘겹게 그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가게를 열어 전환기를 맞았다. 잡지 광고에 실린 캐릭터 티셔츠·인형·책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그 반응이 뜨거워서 엘에이에 두 곳,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뉴욕에까지 가게를 확장하게 된 것이다. 가게는 이스트 빌리지에서 흔히 볼 만한 집의 일층을 개조한 것이라 스무 평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인기를 얻는 디자이너 인형과, 만화책, 미술 및 디자인 잡지, 인디잡지 등으로 꽉 채워져 있다. 가게 바로 오른쪽에 갤러리가 있어서 잡지 인터뷰에 실린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사기도 한다.
무료 배포되는 팸플릿을 뒤지다가 눈에 번쩍 띄는 잡지를 발견했다. 보일라(VoiLa)다. 서진씨가 편집장으로 일했던 인디 잡지인데 한국의 젊은 미술작가들의 그림과 인터뷰가 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왜, 이곳에 보일라가 놓여 있는 것일까? 분명 서진씨가 이곳에 갖다 놓고 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보일라 한 부를 집어 들고 거리를 나선다. 점점 그가 있는 곳에 가까워짐이 느껴진다. 첫날의 막막한 느낌과는 달리 꿈에서 그를 만난 것처럼 어쩌면 내일 혹은 모레 그를 마주칠 것만 같다. 내일부터는 좀더 많은 서점을 둘러봐야겠다. 서점을 들르면서 책을 한두 권씩 살 수밖에 없다. 둘러맨 가방의 어깨가 점점 무거워짐에 따라 서진씨를 점점 원망하게 되면서도, 그 무게만큼 뿌듯한 느낌이 전해진다. 숙소의 침대에 드러누워 책과 잡지를 펼쳐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437 E. 9th Street, grny.net
글·사진 서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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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빌리지의 숨은 먹거리들
라멘에 공기밥과 김치 추가요
서진씨를 찾아 서점을 뒤지다 보니 시도때도 없이 배가 고파졌다. 뉴욕까지 와서 맥도날드를 찾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레스토랑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이스트 빌리지를 뒤지다가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역시 우리 입맛에는 중국·일본 음식점이 알맞고, 뉴욕에는 다행히 수도 없는 아시아 음식점이 포진해 있었다.
1. 덤플링 맨 (Dumping Man)
우리나라 말로 해석하자면 만두맨 정도가 되는데 군만두·찐만두를 저렴한 가격에 먹는 곳이다. 좁은 가게의 카운터에 앉으면 중국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떨며 만두를 빚는 모습을 구경한다. 치킨·돼지고기·야채 등의 만두 속도 고를 수 있고, 캐릭터도 무척 귀엽다.
100 Saint Marks P. / dumplingman.com
2. 라이 라이 켄(Rai Rai Ken)
이곳에서는 싼값에 일본 전통라면(라멘)을 맛본다.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일본 라면 전문점이 생겨나고 있지만 멕시칸 조리사가 일본 라면을 만드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나 이색적이다. 따로 테이블은 없고 바에 둘러앉아 조용하게 라면을 먹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솥에는 얼마나 우려내는지 짐작할 수 없는 라면국물이 부글부글 끓는다. 사이드 메뉴로 공기밥과 김치를 추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
214 E 10 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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