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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 중국이 점령한 라싸 거리를 지배하는 건 중국의 공안요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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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라싸에서의 불편한 기억 이후 광화문에서 매일 촛불을 켜 드는 어느 여행자의 이야기
여행은 변화의 힘이다. 적어도 중국 정부의 티베트 시위 무력진압 직후 3월17일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티베트 해방’을 외치는 ‘티베트의 친구들’(thinktibet.cyworld.com)이 그러하다. 이들은 월~금요일 저녁 7시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시위를 이어가고, 토요일 오후엔 인사동에서 벼룩시장 좌판을 편다.
재밌게도 운동의 주도자들은 티베트 여행자들이다. 이들은 “여행이 의식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지난해 티베트와 인도 다람살라를 들른 교사 허지혜(26)씨는 “티베트 난민을 만나면서 티베트의 여행지로서의 ‘환상’이 아닌 ‘현실’을 보게 됐다”고 말했고, 지난 2월 티베트에서 20일 동안 여행한 대학생 황수영(23)씨는 “이번 일을 통해 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티베트를 여행한 사람으로서, 맨 처음 인터넷에 ‘연대’를 호소해 자발적인 운동을 끌어낸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진용주씨의 글을 받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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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관의 환상 말고도 현실도 보라. 모두 티베트의 슬픈 자리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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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거니, 풍경과 사람과 문화의 아름다움에만 눈을 두지 말자. 그것들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 뒤에 혹여 슬픔은 없는지 보자. 슬픔의 자리가 있다면, 그 연유가 무엇인지 묻고 따지고 배우자. 그 슬픔의 자리에 희망을 심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하자.”
3월16일, 개인 블로그와 티베트 관련 여러 모임들에 격문(중국은 티베트 학살을 중단하라!)을 올리고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도중, 여행자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슬픔의 자리에 눈길을 주고, 그에 대해 배우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것. 그것이 여행자의 윤리라고 그때 생각했다.
티베트에 갔던 건 2003년 9월이었다. ‘20세기의 기억-아시아 평화기행’이라는 연재의 하나로 티베트 라싸와 인도의 다람살라를 묶어 쓰기 위해 떠난 길. 꼭 취재가 아니라도 오래도록 라싸는 가보고 싶은 곳 중 늘 으뜸에 드는 곳이었다. 몸으로 직접 만난 라싸는 내가 상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포탈라 궁과 조캉 사원, 드레풍 사원 등 이미 이미지로 익숙한 곳들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고 장엄했지만, 그뿐이었다. 도시의 곳곳에서 오체투지로 조캉 사원을 향하는 순례자들을 보며 강렬한 인상을 받았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매혹적이고 강렬한 아름다움은 분명했지만, ‘식민지’라는 조건 속에서 그 아름다움은 아슬아슬했다. 나는 그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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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라궁 아래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휘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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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박물관에서 만난 두 개의 역사
그 불편함은 라싸에서의 첫 행선지였던 서장(시짱)박물관에서부터 시작됐다. 중원의 서쪽 장족의 땅, 서장(西藏)을 붙인, 서장박물관. 한족 혹은 중국 정부의 관점에서 만든 박물관임이 이름에서부터 명확하다. 그곳엔 두 개의 역사가 있었다. 하나는 티베트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티베트 역사를 자기들 역사 안으로 품으려고 하는 중국의 역사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이건 그들 나름의 역사를 오랫동안 만들고 이루고 지켜왔다면,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역사가 다른 어딘가의 역사에 슬그머니 편입되어 더 큰 역사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서장박물관에선 그런 일이 ‘역사과학’의 명목으로 태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역사과학’ 어디에고 이들 티베트인들이 스스로 항상 독립적인 역사를 가진 민족으로, 하나의 나라로 자기들을 인식해 왔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서장박물관을 나와 시내 곳곳에서 공안과 오성홍기를 지겹도록 보며, 나는 묻고 또 물었다. 왜 당신들이 이곳에 와 있는가? 왜 당신들이 이곳에서 거만한 지배자로 남아 있는 것이냐? 서장박물관의 한 전시물에서처럼 한족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티베트를 해방시킨 것이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의 티베트는 소수의 승려에게 모든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절대적 봉건사회였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라면 19세기 중반부터 중국과 그 외 세계의 모든 곳을 탐내고 상처 입힌 서구 식민주의자들에게 이미 물릴 만큼 들어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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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서 접하는 티베트불교. 인도의 다람살라 등의 티베트난민 거주촌에서도 그들의 문화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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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의 티베트 여행은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지 않게 되었다. 라싸에서 네팔의 카트만두로 향하는 우정공로, 그 길 위에서 본 풍광은 숨이 막힐 듯 아름다웠지만, 정작 더 숨이 막히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검문소들이었다. 한족 군인들은 우리 여권을 뒤적이며 무례하게 웃어댔다. 우리가 그러할진대, 그 길을 걸어서 넘는 티베트인들은 또 어떤 취급을 받을까. 그렇게 식민지에서 아름다움과 유쾌함, 행복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일 뿐이었다.
3월16일, 격문을 올리고 다음날인 3월17일부터 오늘까지 계속 인사동에서, 광화문에서, 중국대사관 앞에서, 또 성화가 들어오던 시청광장 앞에서 촛불을 켜고 피켓을 들고 티베트 깃발을 휘날리고 목소리를 높인 건, 그 불편한 여행의 기억 때문이다.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다, 라는 티베트인들의 외침이 총칼 앞에 맥없이 쓰러지지 않도록, 어쩌면 나와 친구가 되었을 수 있을 누군가가 덜 고통 받도록, 그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 나는, 우리는 안전한 금 안쪽에서 목소리를 보탤 뿐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목소리들이, 시위 한번 하는 것이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의미일 저 티베트인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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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친구들’, ‘티베트 평화연대’ 등의 단체가 한국에서 티베트 인권 활동을 벌인다. 티베트의 해방을 주장하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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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막히던 풍광, 숨막히던 검문소
한달 보름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유인물 하나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제는 피켓과 플래카드, 깃발, 앰프, 포스터 등 짐도 제법 많아졌다. 서로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울컥!’하는 마음으로 모이기 시작해 이제까지 한 차례의 평화콘서트와 두 차례의 세계시민행동과 네 차례의 평화행진, 그리고 다섯 차례의 장터와 서른다섯 차례의 촛불시위를 만들어냈다.
‘우리도 어려운데 무슨…’ 하며 비웃고 지나는 이들에게도 이제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어려운 이들, 슬픔의 자리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 공부나 해라, 이것들아’라는 말에도 웃으며 대꾸할 수 있게 되었다. 마흔하나, 배울 만큼 배운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배울 게 많다고, 바로 이 거리에 서서 세상의 야만과 또 그에 맞서는 우정의 정치에 대해 배우고 있다고, 그 배움이 나와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그래서 이제 생각한다. 세계의 곳곳을 떠다니는 여행은 분명 사람을 성장시키지만, 그 여행의 기억이 어떤 행동이 된다면, 그렇게 여행자의 윤리가 행동의 근거가 된다면 굳이 여행하지 않아도, 내가 서 있는 이 광화문 한 평의 땅 위에서도 역시 더 큰 성장과 성숙을 이룰 것이라고. 그게 여전히 내가 여행자로서 매일 저녁 촛불을 켜 드는 까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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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티베트 난민과 연대하는 이들의 상당수는 티베트 여행자 출신이다. 여행의 기억이 행동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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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용주/디자인하우스 출판부 편집장
사진 신범숙/티베트의 친구들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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