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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공포에 떨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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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20돌] Esc / 20살 한겨레군의 세계여행
김어준의 여행 자존심 퀴즈
유럽 배낭여행에 임하는 우리의 마땅한 자세에 관한 소고
유럽을 배낭여행하려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한 팁 몇 가지 정리하고자 한다. 왜. 뭐, 그냥 그러고 싶다.
1. 그걸 최초로 지각한 건 1991년 로마 테르미니역에서다. 무솔리니가 완공시킨 그 거대한 석조건물은 여름이면 새벽부터 유럽 전역에서 밤새 달려온 기차들이 부려 놓는 배낭족들로 가득 찬다. 그들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건 숙소 삐끼들. 역 한구석에서 일주일째 노숙하던 난, 그날도 새벽잠 깨우는 그들의 시끌벅적한 상봉을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뜩 삐끼에 대한 대응이 인종마다 다르단 걸 깨달았다. 다가오는 삐끼에게 한발 다가서며 뜨거운 물 나오느냐 따위의 숙박조건에 대한 질문부터 던지는 게 서구인들의 평균적인 첫 대응이라면 동양에서 온 자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색이다. 미세하게, 주춤거린다. 삐끼 얼굴 쳐다보며 동료와 수군거린다. 얘, 따라가도 괜찮을까. 때론 몸을 뒤로 젖히거나 살짝 물러서기도 한다. 다르다. 낯선 곳이라? 남아공 배낭족도 이역만리 첫 방문인 건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엔 사기꾼 많대서? 역시 매일반이다. 호객에 응하는 손님치곤 지나치게 다소곳한 이런 태도, 동양적 특질인가. 아니다. 방콕 첫 방문 땐 그들도 안 그런다. 상대는 그저 삐낀데. 새벽부터 역에 나와 먹고살려 발버둥치는 생활인들에 불과한데. 왜.
삐끼한데 뭐 그리 다소곳한가
왜냐. 삐끼가 백인이라서. 설마. 그렇다. 백인인 상대가 나쁜 의도를 가진다면, 동양인인 나를 압도해 내 의지에 반하는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그런 피부색 권력지도가 그들 머리에 선험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논리 이전에 작동하는 그 백색공포는 이탈리아에 사기꾼 많단 정보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삐끼 앞에서의 소극적 태도를 만들어낸다. 돈은 지가 내면서. 지가 손님이면서. 동양인들, 흰색 피부를 우월적 존재의 징표로 부지불식간 기정사실화하고 있단 거, 그날 그렇게 처음 깨달았다. 이후 몇 년간 배낭여행 동안 유사한 장면, 무수히 목격했다. 백인 식당웨이터에게조차 과잉 깍듯한 동양인들, 마닐라의 식당에선 절대 안 그런다. 이거, 나이나 학력, 심지어는 돈과도 무관했다. 여행 다니며 나, 속 많이 상했다. 서구가, 그들의 상대적 우월성이 담보되도록 동양에 부여한 이미지와 그를 근거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와 우위를 당연시하는 인식을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른다는 거,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나 알았다. 그리고 그런 서구를 수입하며 그런 시각까지 고스란히 내 것으로 받아들여 이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데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동양의 사고는 그렇게 배낭여행 중에 처음 발견했고. 15세기까지만 해도 동방에서 기원한 지중해 문명의 아류에 불과했던 서구에 대한 이런 열등의식과 동양의 자기비하를 어떻게 해체해야 하느냐, 그 이야긴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 대목에서 배낭족들에게 드리는 첫 번째 팁 나간다. 잘사는 나라에서 주눅 들지 말고 못사는 나머지 나라에서 유세 떨지 마라. 그만한 꼴불견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 2. 아까워말라, 때론 과감히 질러라 1번이 너무 길었네. 뭐 그럼 이제부턴 세 줄 요약. 두 번째, 배낭여행이라도 때론 과감하게 질러라. 거기서 아낀 몇십만원, 돌아와서 아무리 합리적으로 소비한들 그때 놓친 공연, 물건, 만남으로 누릴 수도 있었을 고유한 즐거움, 결코 보상받을 수 없다. 영원히. 세 번째. 방문하는 국가의 위인 알아뒀다 현지인들과의 대화 시 냅다 칭찬해라. 퀴리 부인이나 코페르니쿠스 혹은 교황 바오로 2세에 감탄해 주면 기분 찢어지는 폴란드인들과 친구 먹기 껌이다. 유사하게 주변국과의 관계 미리 공부하는 것도 매우 유용하다. 네덜란드인과 네덜란드인이 생각하는 벨기에인들의 어리숙함에 대해 놀려먹는 거 대따 재밌다. 네 번째.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그리고 거기에 자신을 가져라. 바로크 양식을 대표한다고 해서 나보고 어쩌라고-자세, 필요하다. 박물관·미술관 무시하고 자기 감성 자극하는 걸 찾아내 그걸 즐겨라. 안 그럼 어딘지 기억도 안 나는 건물 사진만 남는다. 다섯 번째. 현지인이 가는 곳을 가라. 여행안내센터에 가서 식당을 물어도 그냥 맛있는 식당이 어디냐 묻지 말고, 바로 당신이 친구들과 저녁 먹으러 혹은 놀러 가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라. 여섯 번째. 중간중간 모든 일정을 무시하고 그 동네에서 퍼져라. 가이드 책자에 나온 프라하의 모든 명소를 샅샅이 다 뒤지는 거보다, 그곳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하루 종일 만든 국적 불명의 요리 해 먹으며 맥주파티 하는 게 백배는 더 신난다. 또 뭐 있나. 어, 지면 다 됐네. 그럼 다음 이야긴 다음 기회에. 39. 여기서 돌발퀴즈. 근대 유럽의 문화적 동방취미로서의 유행을 일컫는 게 아니라,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권력의지이자 사고방식이란 의미로 이 오리엔탈리즘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1)에드워드 사이드 2)에드워드 노튼 3)브래드 피트 4)다니엘 헤니 5)오리엔탈 드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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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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