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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티드 매터에서 파는 책은 예술가들이 직접 제작한 한정 수량의 아트북이다. 특이한 아트 잡지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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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서진의 뉴욕 서점 순례 3 - 30대 중반의 느낌을 품은 웨스트 빌리지를 뒤지다
화장실 가기 전과 간 뒤의 사정이 다르듯이, 책을 계약하기 전과 계약하고 난 뒤의 작가들의 사정은 다르다. 계약하고 난 뒤 편집자들은 원고를 기다리는 쪽이기 때문에 원고가 늦어지면 독촉을 할 수밖에 없다. 계약서에 나와 있는 탈고 일자를 지켜주면 고맙겠지만 대부분의 저자들은 마감 일자를 넘긴다. 그래서 마감을 넘길 것을 예상하고 작업을 한다. 문제는 원고가 늦어지는 건 고사하고 연락이 안 되는 경우다. 서진씨 같은 경우가 최악으로, 아예 우리나라를 떠나버려 3개월 동안 연락이 안 되는 경우다. 신변상의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걱정까지 끼친다.
서진씨를 찾아 뉴욕에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때우면서 생각한다. ‘굳이 뉴욕까지 와야 했나?’ 남들은 브로드웨이 쇼도 보고, 엠파이어 빌딩에도 올라간다지만 한가롭게 관광할 틈도 없다. 서점을 몇 군데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하루가 지나가고, 산 책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서진씨를 찾아야 한다는 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온갖 불평을 하면서도 밤을 새워 가며 책을 만드는 것도, 발이 퉁퉁 불어터질 때까지 서점을 돌아다니는 것도, 결국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책을 사랑한다. 책만 보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눈이 또렷해진다. 아빠가 서재에 쌓아둔 세계명작전집 스무 권을 초등학교 때 독파해 버렸을 정도다. 책의 내용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수많은 문자들의 환상적인 조합을 읽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책에는 다른 매체가 담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아마도 그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이토록 책에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만드는 사람이지, 쓰는 사람은 아니다. 책을 쓰는 서진씨는 과연 어떤 책을 찾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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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티드 매터 서점은 소규모 화랑들이 모인 첼시 지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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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웨스트 빌리지와 첼시의 서점
어제는 이스트 빌리지의 서점을 순례했으니, 당연히 오늘은 웨스트 빌리지를 돌 차례다. 미리 서점을 표시해 둔 지도를 손에 쥐고 다시 거리로 나선다. 이스트 빌리지가 20대 초반의 분위기라면 웨스트 빌리지는 30대 중반의 느낌이 난다. 제법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야외석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집들도 훨씬 아담하고 분위기 있다. 가로세로 반듯한 보통의 뉴욕과는 다르게 대각선으로 이리저리 나 있는 길 때문에 헷갈리기도 한다. 과연 이런 곳에는 어떤 서점들이 숨어 있을까? 그리고 어떤 책들을 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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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구멍이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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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뜨겁게 야한 책들은 없더라
오스카 와일드 북숍
“나는 천재인 것 빼고는 신고할 게 없어요.” 유명한 게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뉴욕에 입국하며 세관원에게 한 말이다. 한번도 공개적으로 게이인 것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그 발언만으로도 충분하다. 오스카 와일드 북숍에 걸려 있는 무지개 깃발은 웨스트 빌리지의 다른 무지개 깃발보다 자랑스럽게 보인다. 크리스토퍼 스트리트는 게이 인권운동의 발단이 된 스톤월 바가 있는 곳이고, 그곳에 오스카 와일드의 이름을 딴 세계 최초(1967년)의 게이 전문 서점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낯 뜨거울 정도로 야한 책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잔뜩 했으나, 문학 관련 서적이 대부분이다. 대형서점에도 ‘게이 앤 레즈비언’ 섹션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여행, 역사, 문학, 회고록, 잡지 등을 잘 분류해 놓았다. ‘어, 이 작가도?’ 하는 의문이 드는 책들도 곳곳에 꽂혀 있다. 서점은 무척 좁아서 대여섯 사람으로 서점이 꽉 찰 정도다. 4년 동안 이곳에서 일했다는 세실리아는 대부분의 손님은 관광객이거나 오스카 와일드의 팬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은 보지 못했나요?”
“아, 전 세계의 사람들이 매일 방문하기 때문에 기억나는 사람은 없는데요.”
나는 잡지 코너에서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들의 나체가 잔뜩 실려 있는 잡지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곁에 서 있는 남자가 게이인지 아닌지 자꾸 눈길이 갔다.
추신: 서가에 레즈비언 미스터리 섹션이 존재한다.
Oscar Wilde Bookshop / 15 Christopher St. / oscarwildebook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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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추리 전문 서점도 두 곳만 명맥을 유지한다. 파트너스 앤 크라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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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함께 온 개에게는 쿠키를
스리 라이브스 앤 컴퍼니
오스카 와일드 북숍에서 골목으로 조금만 지나가면 붉은 창틀과 문이 인상적인 작은 서점이 나온다. 정말 주위에 눈에 띄는 음식점도, 가게도 없는 곳에 이런 작은 서점이 있다니 관광객들은 쉽게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삐거덕거리는 마룻바닥과 원목으로 된 책장, 전통적인 초록색 독서등으로 가득 채워진 서점 안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대부분의 손님은 이 근처에 사는 주민으로 보인다. 주인은 손님의 취향을 이미 파악하고 있어서 이런저런 책을 추천해 준다. 가끔가다가 ‘제 아들이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생일선물로 좋은 책은 어떤 것일까요?’ 같은 곤혹스러운 주문도 받는다고 한다. 주로 최근에 주목받는 문학책으로 사오십 평 되는 서점은 가득 채워져 있고, 한쪽에는 여행 관련 서적도 마련되어 있다. 주인과 함께 산책 나온 개에게는 쿠키를 준다. 만약 내가 이 동네에 산다면 반드시 매일 한 번은 꼭 들를 만한 서점이다.
Three Lives & Company / 154 West 10th Street / threeliv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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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스 앤 크라임에서 “혹시 한국 작가의 책은 없냐”고 물어보니 일본 작가의 책을 권한다.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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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중간중간엔 열정적인 추천평
파트너스 앤 크라임
추리·스릴러 소설에 대한 미국인들의 애정은 각별해서, 어느 대형서점에서도 에스에프(SF) 소설과 함께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팬층이 두터워서 그들을 위해 추리소설 서점이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뉴욕에 네댓 개의 추리 전문 서점이 있었다고 하나 이제는 단 두 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반지하에 자리잡고 있고, 근처에 레스토랑이 많아 지나쳐 버리기 쉽다.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면 오십 평 정도 되는 공간에 빽빽하게 작가별로 추리소설이 꽂혀 있다. 서가 중간중간에 포스트잇 크기의 열정적인 추천평을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갔던 추리작가 150명의 사인본 도서도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혹시 한국 작가의 책은 없냐고 물어보니 일본 작가의 책을 알려준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이나 ‘그로테스크’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분발해서 좋은 추리작품을 이곳까지 알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흐음, 작가가 미스터리한 책을 찾으러 뉴욕의 서점을 뒤지고, 편집자는 그 작가를 쫓아다니고 … 어디서 읽어본 추리소설 같은데요?”
서진씨에 대해서 물어보자 나이가 지긋한 점원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Partners & Crime Mystery Booksellers / 44 Greenwich Ave / crimepay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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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북숍의 매니저 세실리아는 4년째 일한다. 이 서점의 손님은 대부분 관광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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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 수량의 아트북 “이런 것도 책이야?”
프린티드 매터
웨스트 빌리지에서 서북쪽으로 가다 보면 소규모 화랑들이 몰려 있는 첼시에 다다르게 된다. 예전에는 고기를 가공해서 보내는 공장들이 많았던 지역(Meat Packing)인데, 점점 화랑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해서, 이제는 럭셔리한 콘도까지 등장한 곳이다. 이런 분위기에 딱 맞는 프린티드 매터 서점에서는 다른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책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파는 책은 예술가들이 직접 제작한 한정 수량의 아트북이다. 정부와 시 보조로 운영되는 이 서점에서, “정말 이런 것도 책이야?”라고 말이 나올 정도로 특이한 사진집, 일러스트집, 시디,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Printed Matter Inc. / 195 10th Ave. / printedmatt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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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뉴욕 서점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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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을 뒤져 보니 아직도 갈 서점이 서너 군데나 남아 있다. 서울에서 과연 이렇게 걸어서 10분 정도마다 독특한 서점을 만날 수 있는 지역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교보문고가 있는데 왜 작은 서점에 가야 하는지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다. 대형서점에서 일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책을 제대로 알고 취급하는 서점과 책을 단순히 물건 취급하는 서점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사흘이 끝나가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서진씨를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각 서점에 서진씨를 찾는다는 말과 명함을 남겼지만 어느 곳에서도 아직 연락이 없다. 오늘 들렀던 서점에서는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볼 뿐 서진씨를 봤다고 하는 곳은 없었다. 배가 고파 온다. 밥을 먹어야 하나, 서점을 더 둘러봐야 하나. 이런 생각으로 허드슨강에 해가 지는 걸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헬로!”
안녕하세요, 라고 말할 뻔했다.
“안녕하세요, 서진입니다. 저를 찾고 계신다고요?”
수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굉장히 낯설어서 서진씨라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11번가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글·사진 서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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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 라이브스 앤 컴퍼니의 내부. 한쪽에는 여행책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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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힘을 뺀 낭독회들
작가와 독자가 툭 터놓고 만나는 모임이 매일 10여회
뉴욕에서는 날마다 10개가 넘는 서점에서 작가들의 낭독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낭독회가 어떤 준비가 필요한 특별한 행사이거나 베스트셀러 작가만이 할 수 있는 행사인 반면, 뉴욕에서는 새로 나온 일정 수준의 책에 대해서는 의례적으로 치르는 행사일 뿐이다. 그래서 특별한 형식이나 준비 없이 서점에서 간단한 안내와 함께 시작된다. 따로 준비된 강연은 없다. 보통은 두세 명의 작가가 한 시간 동안 자신이 쓴 새로운 책의 챕터를 읽는다. 그리고 독자의 질문을 받고 사인을 해주면서 한 시간 내로 끝을 낸다. 한 작가가 뉴욕에서 이런 행사를 두세 번 정도 치르고, 다른 도시로 북 투어를 떠나는 경우가 보통이다. 독자는 작가를 직접 볼 수 있어서 좋고, 작가는 부담 없이 새 책의 반응을 보거나 홍보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는 점에서 일거양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어깨에 힘을 뺀, 캐주얼한 낭독회가 매일 열렸으면 좋겠다. 터놓고 얘기해서, 작가들이 베일에 싸인 사람도 아니고, 뭔가 본받을 만한 것이 반드시 있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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