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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28 21:33 수정 : 2008.06.01 10:19

그가 경멸한 소시지는 나의 눈물겨웠던 향수 음식.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초짜 요리사가 진땀을 흘리며 돼지에 칼을 댄 뒤
지하창고에 살라미를 주렁주렁 매달기까지

이탈리아 본토에서 지루하도록 먼 곳 시칠리아. 다시 이곳의 깡촌에 자리잡은 전통식당의 주방장 주세페 바로네는 돼지 반 마리를 손수 잘라 프로슈토와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프로슈토 감으로 뒷다리를 잘라냈다. 사족이지만, 돼지든 소든 큰 짐승을 잡은 다음 반으로 갈라 공급된다. 정육점이나 큰 식당에서 이것을 받아 다시 작은 부위로 나눈다. 이런 과정과 동물의 해부학적 경험이 없는 이들은 종종 착각을 한다. 등심이나 안심 같은 부위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뚱이의 한가운데 달려 있는 부위를 빼면, 이런 가축들의 부위는 대개 둘이다. 등심이나 안심은 가운데 등뼈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달려 있다.

주세페는 뒷다리를 냉장고에 넣고는 재빨리 칼을 놀렸다. 서너 번 칼질로 목살 부위가 떨어져 나왔다. 카포콜로. 역시 생햄을 만들면 최고의 맛을 내는 부위다. 한국에서는 ‘주먹고기’라고 부르면서 소금구이를 하거나 얇게 포를 떠서 돼지갈비와 섞어 파는 부위다. 나는 이 부위를 보면서 소싯적 드나들었던 연대 앞 소금구이 집들을 떠올렸다. 군침이 흘렀다.

카포콜로와 소싯적 소금구이집의 추억


매캐한 연탄 연기 속에 왕소금을 뿌려 굽던 그 고기가 바로 소금구이였지 아마! 얼마나 연기에 그을렸는지 집에 가서 머리를 감으려면 비누가 먹지 않아 거품이 일지 않을 정도였다. 주세페가 내 등을 툭 치면서 칼을 내주었다. 난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논 포소 탈리아레 베네!”(글쎄, 난 잘 못 자른다고!)

주세페는 연신 “프레고, 프레고!”(괜찮아, 해봐!)를 외치며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았다. 개구리 뒷다리 하나 못 자르던 내가 ‘토티’라고 불리던 이 엄청난 크기의 돼지 몸통을 잡을 수 있을까?

등뼈 사이로 칼집을 내고, 갈비뼈를 추린 다음 조심스럽게 등심을 발라냈다. 한국에서는 돈가스나 만드는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이탈리아에선 최고급 스테이크감이다. 갈비뼈를 붙여서 잘라야 하는 거라 아주 어렵다. 주세페가 칼을 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그러쥐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칼잡이’인 거야?

중요한 과정이 끝나니까 일은 일사천리였다. 부드러운 안심은 갈비뼈 안에 수줍게 붙어 있기 때문에 칼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손으로 근막을 부욱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아쉽게도 갈매기살, 항정살 같은 최고급 부위도 잡고기 취급을 받는 게 이탈리아다. 잡고기는 살라미의 재료가 된다. 살라미는 바람에 말려서 딱딱하게 만들어 두고두고 먹는 소시지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사람은 물론, 미국과 일본 사람도 사족을 못 쓰는 비싼 소시지다.

이탈리아식 소시지는 가공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고기를 갈아 창자에 넣어 숙성시키지 않고 신선한 상태에서 바로 먹는 것을 살시체, 창고 시렁에 매달아 숙성시킨 것이 살라미다. 우리가 즐겨 먹는 소시지는 ‘부스텔’이라고 부르는데, 딱 프랑크 소시지로 보면 된다. 이건 살라미 대우를 하지 않고 싸구려 취급이다. 전통의 이탈리아식 육가공이 아니라는 이유다.

“부스텔? 흥, 아기들 이유식이지. 우린 그런 건 안 먹어!” 주세페는 소시지를 경멸했다. 살라미도 못 만드는 정체불명의 부위에 밀가루를 섞어 만든다며 무시했다. “로베르토, 이런 말이 있다. ‘네가 뭘 먹는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마’라고.”

그는 18세기 프랑스 미식가 사바랭의 말을 인용했다. 그의 눈빛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소시지 마니아였다. 이게 딱 입맛에 맞았던 까닭이다. 보들보들하고 폭신폭신했으며, 뽀드득하게 씹히는 탱탱한 살이 일품이었다. 주세페가 뭐라고 하든 어떤 때는 이걸 먹어야 했다. 한국에서 먹던 소시지 맛과 똑같다는 걸 혀가 스스로 알아낸 것이었다. 그다지 소시지를 먹지도 않던 내게 졸지에 이 소시지가 향수 음식이 됐다. 심신이 아플 때는 그저 먹어야 한다. 먼 시칠리아 땅에서 향수병에 시달리면 이 소시지가 약이었다. 하얗게 쌀밥을 지어 뜸을 들일 때 이 소시지를 통째로 두 가락쯤 넣는다. 그러면 금세 익는다. 밥을 내린 후 고추장 두어 숟가락을 넣어 비비면 그럭저럭 고향 맛을 내주었다. 반찬도 있었다. 주방에서 훔쳐온 마늘을 통째로 소금물에 담가두었다. 이걸 꺼내 고추장에 박아두면 제법 장아찌 맛을 냈다.

재료의 근본에 집착하는 주세페의 요리법

살라미는 바람을 맞혀 숙성시킨다. 박찬일
흑흑, 명색이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러 간다고 큰소리 친 주제에 몰래 숨어 고추장에 엉터리 소시지 밥이라니! 그래도 눈물겹게 이 밥을 먹었다. 살려면 별 수 없는 법이다. 하다못해 그 흔한 중국 식당이라고 하나 있는 동네였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테지만, 음식 향수에는 장사도 못 당한다.

시칠리아의 특급 주방장들은 뭐든 직접 만들어 쓰는 걸 최고로 친다. 그들은 전화 한 통화로 비둘기 염통까지 배달받는 도시 주방장들을 ‘삼류’라고 대놓고 비웃는다. ‘어떻게 직접 만드는 걸 보지도 못한 재료’를 섣불리 쓰냐는 얘기였다. 올리브유도 믿을 만한 사람이 첫물로 짠 걸 골라 썼고, 고기도 아는 목축업자가 기른 걸 골랐다. 가을이면 버섯을 직접 따거나 아는 노인들에게서 버섯을 받아썼다. 생선도 믿을 수 있는 동네 친구가 받아온 싱싱한 놈들만 기꺼이 프라이팬에 올렸다.

주세페의 요리법은 확실히 달랐다. 그는 요란한 요리법은 몰랐다. 그러나 재료의 근본에 더 집착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의 요리가 이탈리아에서도 주목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여유식(슬로푸드·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전통적이고 다양한 음식 문화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식생활 운동) 운동의 주요 멤버였고, 매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바른 먹거리 알리기 행사인 ‘테라 마드레’(어머니의 대지)에 기꺼이 주빈으로 참석해 열변을 토했다.

주세페는 종이봉지를 끌러 무언가를 꺼냈다. 주먹만한 하얀색 기름덩어리 같은 거였다. “어린 양의 창잘세. 살라미를 만들려면 양장이 있어야 하지.” 살라미 껍질이 너무 두꺼우면 맛이 없다. 그런데 돼지창자는 크고 두꺼워서 얇게 만들자면 지나치게 늘어난다. 그래서 어른 팔뚝처럼 두꺼운 ‘살루미’를 만들 때나 쓰고, 보통 소시지처럼 가는 것은 만들지 않는다. 양의 작은창자가 딱 좋다. 대신 얇아서 잘 찢어진다. 소금물에 씻어야 냄새가 없어지는데, 이때 살짝 구멍이 나면 당시엔 모르지만, 나중에 살라미 속을 짜 넣을 때 펑크가 난다.

역시 살라미는 속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싱싱하고 좋은 고기와 집안에서 누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레시피가 살라미 맛을 결정한다. 주세페는 마늘과 허브의 배합을 중시했다.

“마늘이 많으면 쓴맛이 나고, 적으면 비린내가 나지. 허브는 많으면 떫고 고기 맛을 가려 버리고, 적으면 누린내가 난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말아야 하는 게 살라미야!” 아니, 무슨 종갓집 할머니의 김장할 때 잔소리 같군!

커다란 함지에 잘게 다진 고기와 비계를 넣고 역시 다진 허브, 마늘, 돼지피, 가루치즈, 후추를 넣었다. 그 배합은 오직 주세페의 손끝에 달려 있었다. 끼적여 놓은 레시피도 없었다. 그저 주세페의 심각한 표정과 손맛이 살라미 맛을 좌우하는 모양이었다.

묵은 소금 자루를 꺼내 쏟아붓다

그는 마지막으로 소금 자루를 꺼냈다. 멀리 트라파니의 염전에서 가져온 묵은 소금이었다. 천일염. 바다 냄새가 물씬 났다. 시칠리아는 질 좋은 소금 산지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바닷가에 가면 소금밭이 있다. 서해안 소금밭처럼 천일염이 눈처럼 쌓여 있는 광경도 볼 수 있다. 거의 고기 양의 절반은 될 만큼 엄청난 양의 소금을 부었다. 살라미는 소금 반, 고기 반이었다.

그는 요리복 팔뚝을 걷고 속을 치대기 시작했다. 오래 치댈수록 끈기가 생기고, 맛이 좋아진다. 조금씩 반죽에 끈기가 생기더니 이내 한덩어리로 뭉치듯 차지게 엉겼다. 흘리는 진땀으로 소금간이 조금 더 짜졌을 게다. 그래서 땀 많이 흘리는 여름에는 살라미를 만들지 않는지도 모른다. 반죽은 냉장고에서 하루 쯤 숙성된다. 사람이 주물러놓은 반죽이 서로 진액을 뿜으며 숙성될 게다.

다음날, 주세페는 소금물에 담가 놓았던 양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펴서 깔때기 주둥이에 끼우고 고기 반죽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 두 길이가 되면 재빨리 창자를 돌려감아 매듭을 지었다. 그렇게 연속으로 살라미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갓 만든 살라미를 불에 구우면 맛이 기막히다. 숙성된 맛은 없지만, 싱싱하게 입맛을 돌게 한다. 마치, 김장날 먹는 겉절이 같은 거다. 빵에 구운 살라미를 구워 요기를 하고 지하 창고에 살라미를 주렁주렁 매달아 말리기 시작했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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