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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경멸한 소시지는 나의 눈물겨웠던 향수 음식.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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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초짜 요리사가 진땀을 흘리며 돼지에 칼을 댄 뒤지하창고에 살라미를 주렁주렁 매달기까지 이탈리아 본토에서 지루하도록 먼 곳 시칠리아. 다시 이곳의 깡촌에 자리잡은 전통식당의 주방장 주세페 바로네는 돼지 반 마리를 손수 잘라 프로슈토와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프로슈토 감으로 뒷다리를 잘라냈다. 사족이지만, 돼지든 소든 큰 짐승을 잡은 다음 반으로 갈라 공급된다. 정육점이나 큰 식당에서 이것을 받아 다시 작은 부위로 나눈다. 이런 과정과 동물의 해부학적 경험이 없는 이들은 종종 착각을 한다. 등심이나 안심 같은 부위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뚱이의 한가운데 달려 있는 부위를 빼면, 이런 가축들의 부위는 대개 둘이다. 등심이나 안심은 가운데 등뼈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달려 있다. 주세페는 뒷다리를 냉장고에 넣고는 재빨리 칼을 놀렸다. 서너 번 칼질로 목살 부위가 떨어져 나왔다. 카포콜로. 역시 생햄을 만들면 최고의 맛을 내는 부위다. 한국에서는 ‘주먹고기’라고 부르면서 소금구이를 하거나 얇게 포를 떠서 돼지갈비와 섞어 파는 부위다. 나는 이 부위를 보면서 소싯적 드나들었던 연대 앞 소금구이 집들을 떠올렸다. 군침이 흘렀다. 카포콜로와 소싯적 소금구이집의 추억
매캐한 연탄 연기 속에 왕소금을 뿌려 굽던 그 고기가 바로 소금구이였지 아마! 얼마나 연기에 그을렸는지 집에 가서 머리를 감으려면 비누가 먹지 않아 거품이 일지 않을 정도였다. 주세페가 내 등을 툭 치면서 칼을 내주었다. 난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논 포소 탈리아레 베네!”(글쎄, 난 잘 못 자른다고!) 주세페는 연신 “프레고, 프레고!”(괜찮아, 해봐!)를 외치며 나를 막다른 길로 몰았다. 개구리 뒷다리 하나 못 자르던 내가 ‘토티’라고 불리던 이 엄청난 크기의 돼지 몸통을 잡을 수 있을까? 등뼈 사이로 칼집을 내고, 갈비뼈를 추린 다음 조심스럽게 등심을 발라냈다. 한국에서는 돈가스나 만드는 천덕꾸러기 신세지만, 이탈리아에선 최고급 스테이크감이다. 갈비뼈를 붙여서 잘라야 하는 거라 아주 어렵다. 주세페가 칼을 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그러쥐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칼잡이’인 거야? 중요한 과정이 끝나니까 일은 일사천리였다. 부드러운 안심은 갈비뼈 안에 수줍게 붙어 있기 때문에 칼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손으로 근막을 부욱 뜯어내면 될 일이었다. 아쉽게도 갈매기살, 항정살 같은 최고급 부위도 잡고기 취급을 받는 게 이탈리아다. 잡고기는 살라미의 재료가 된다. 살라미는 바람에 말려서 딱딱하게 만들어 두고두고 먹는 소시지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사람은 물론, 미국과 일본 사람도 사족을 못 쓰는 비싼 소시지다. 이탈리아식 소시지는 가공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고기를 갈아 창자에 넣어 숙성시키지 않고 신선한 상태에서 바로 먹는 것을 살시체, 창고 시렁에 매달아 숙성시킨 것이 살라미다. 우리가 즐겨 먹는 소시지는 ‘부스텔’이라고 부르는데, 딱 프랑크 소시지로 보면 된다. 이건 살라미 대우를 하지 않고 싸구려 취급이다. 전통의 이탈리아식 육가공이 아니라는 이유다. “부스텔? 흥, 아기들 이유식이지. 우린 그런 건 안 먹어!” 주세페는 소시지를 경멸했다. 살라미도 못 만드는 정체불명의 부위에 밀가루를 섞어 만든다며 무시했다. “로베르토, 이런 말이 있다. ‘네가 뭘 먹는지 말해주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마’라고.” 그는 18세기 프랑스 미식가 사바랭의 말을 인용했다. 그의 눈빛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소시지 마니아였다. 이게 딱 입맛에 맞았던 까닭이다. 보들보들하고 폭신폭신했으며, 뽀드득하게 씹히는 탱탱한 살이 일품이었다. 주세페가 뭐라고 하든 어떤 때는 이걸 먹어야 했다. 한국에서 먹던 소시지 맛과 똑같다는 걸 혀가 스스로 알아낸 것이었다. 그다지 소시지를 먹지도 않던 내게 졸지에 이 소시지가 향수 음식이 됐다. 심신이 아플 때는 그저 먹어야 한다. 먼 시칠리아 땅에서 향수병에 시달리면 이 소시지가 약이었다. 하얗게 쌀밥을 지어 뜸을 들일 때 이 소시지를 통째로 두 가락쯤 넣는다. 그러면 금세 익는다. 밥을 내린 후 고추장 두어 숟가락을 넣어 비비면 그럭저럭 고향 맛을 내주었다. 반찬도 있었다. 주방에서 훔쳐온 마늘을 통째로 소금물에 담가두었다. 이걸 꺼내 고추장에 박아두면 제법 장아찌 맛을 냈다. 재료의 근본에 집착하는 주세페의 요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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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는 바람을 맞혀 숙성시킨다.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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