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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04 19:50 수정 : 2008.06.04 19:50

〈섹스 앤 더 시티〉는 충동적이고 감성적이라는 이유로 폄하되는 여성 욕망의 지지대가 돼준다.

[매거진 Esc] 나지언의 싱글라이프

“<섹스 앤 더 시티>가 뭐가 재밌어. 명품이나 좋아하는 여자들 얘기잖아. 현실성도 없고.” 지난 몇 년간 내가 알고 지낸 ‘거의’ 모든 남자들은 저렇게 꼭 ‘재수 없게’ 말했다. 난 남자들의 저 힐난을 들을 때마다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 종족인지, 그 차이가 패리스 힐튼과 애덤 스미스(그는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사람들의 이기심이 경제 행위의 동기라는 이론을 연구하는 데 삶을 바쳤다) 정도쯤 되나 보다고 생각했다. 여자들끼리는 <섹스 앤 더 시티> 얘기만 나와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넷 중에 내가 사만다 할 거야’라는 허접한 얘기만으로도 3시간은 웃고 떠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 말대로 <섹스 앤 더 시티>는 월급을 마놀로 블라닉과 프라다 매장에 바치는 명품 좋아하는 여자들 얘기 맞고, 여자 친구들과의 일요일 브런치가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것만 봐서도 현실성 없는 드라마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섹스 앤 더 시티>가 단순히 ‘된장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는 증거로 종종 사용되는 ‘여자들만의 특별한 우정’에 대해, “우린 친구잖아”라며 서로의 등에 차가운 물을 끼얹어주는 남자들 앞에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면 가끔 여자들의 우정보다 더 중요한 건 매끈하게 잘빠진 하이힐인가 싶을 때가 있다. 캐리가 친구 집에서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잃어버렸을 때의 상황을 상기해보라. 그녀와 친구와의 우정이 회복된 건 그 친구가 같은 구두를 다시 선물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우정이 유지되는 기반 역시 “너도 돈은 없지만 저 비싼 구두 사고 싶지?”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숙명적인 무언의 연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 드라마는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여자들의 욕망 덩어리다.

캐리는 집세 낼 돈은 없어도 당장 화보 촬영해도 될 스타일로 거리를 활보해야 하며 친구에게 왜 돈을 빌려 주지 않는지 달려가 따지고 든다. 조악하고 디자인이 형편 없는 약혼 반지에 짜증내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안달한다. 바보 같은 짓인 줄 알면서 예술하는 남자 따라 파리 가고, 잘나간다 싶으면 오만해진다. 그건 그녀가, 개중 가장 멀쩡한 남자인 에이든의 청혼을 거절하고 못된 남자인 빅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지언의 싱글라이프
이 세상에 이성적인 여자는 없다. 특히, 연애와 소비 문제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이성적일 수 없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경쟁하고, 가끔 상처 주는 말도 잘한다.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들은 가급적 소개하지 않으려 하며, 못생겼는데 시집 잘 간 여자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깎아내리려 한다. 방금 전까지 명품 매장을 기웃거렸으면서 커피숍 옆 테이블에 앉아서 떠드는 ‘된장녀’들을 욕하는 게 여자다. <섹스 앤 더 시티>는 ‘이 모든 비이성적인 것들이 뭐 어때서?’라고 말하는 드라마다. 그게 여자고, 그게 삶이라는 듯이.

<섹스 앤 더 시티>가 싱글 라이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나만 감성적이고 충동적이며 비합리적인 건 아니라는 위로를 건넨 것이다. 여자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남자를 바보 같은 줄 알면서 좋아하고, 암 보험을 들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1년에 세 번 신을까 말까 한 70만원 상당의 세르지오 로시 구두를 사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 말이다.

나지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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