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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이 ‘제비’라는 다방을 차린 1920년대, 그 즈음 다방에서는 원두를 갈아 필터식 커피를 냈다. ‘맹물커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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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유성용의 스쿠터 다방 기행 ⑧
어김없이 인스턴트가 필터식 원두커피 몰아낸 경주시 불국동 맹물다방 상호로 검색해 보면, 전국에 ‘맹물다방’은 세 곳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곳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문을 닫은 모양이다. 삼척과 대전을 거쳐, 내가 마지막으로 찾은 맹물다방은 경주에 있었다. 경주의 다방 이름들은 화랑다방·원화다방 … 뭐 이런 식이다. 화랑들이 활 쏘고 무술 연마하다 언제 다방 들러 아가씨들과 커피 마셨을까마는. 울산과 부산을 잇는 국도변, 화물차들이 쌩쌩 달리는 곳에 맹물다방이 있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무런 특색 없는 실내에 다만 늙은 레지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영감님만 한 분 보인다. 손님이 들어가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신다. 나는 눈 돌릴 곳을 찾다가 주방부터 본다. ‘저런, 이곳 역시 인스턴트 커피를 내는 집이로군!’ 소설가 이상이 다방 차릴 때 이야기 소설가 이상이 ‘제비’라는 다방을 차린 것은 1920년대다. 그즈음 다방에서는 원두를 직접 갈아 필터식 커피를 냈다. 그러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의 피엑스(PX)를 통해 즉석 커피, 곧 인스턴트 커피가 들어왔다. 남아도는 저급 원두로 만들어진 그 커피는 이전에 비해 쓰고 강한 맛이 많이 받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진한 커피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전쟁을 마무리한 막강한 미국의 커피 아닌가. 그때부터 인스턴트 커피가 주종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필터식 원두커피를 내는 집은 ‘맹물다방’이라고 불렀다. 맹물 같은 커피 맛이라고. 하지만 사실 저급 인스턴트 커피는 커피 본래의 맛이라기보다 설탕과 프림 맛으로 넘기는 고약하게 쓴물 아니었겠는가. 아가씨들이 “오빠 프림 몇 개? 설탕 몇 개?” 하며 간질간질 묻고 다정스레 커피 타 주는데 굳이 “나는 블랙이다”라고 말했을 수컷들이 있었을 일 만무한 쓴물. 여하간 그런저런 이유로 커피맛 좋으면서도 억울하게 손님 잃은 맹물다방들은 파리만 날렸고, 그들도 결국은 인스턴트 커피를 쓰게 되었다. 늙은 레지에게 이곳 ‘맹물다방’은 언제 생겼냐고 물었지만 자기는 이곳 주인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고 했다. 노란 스쿠터로 배달 나가고 들어오는 아가씨들 몇이 이따금 보일 뿐 도통 손님이 앉을 만한 자리도 변변찮다. 여직 남아있는 다방은 대개 다 이런 배달 다방들이다. 빤한 다방커피 맛을 보겠다고 경주까지 온 게 아니다. 멀뚱멀뚱 주인을 기다리다 다방 문을 나섰다. 그래도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 다방인데 간판이라도 사진기에 담아야지 싶었다. 그때 웬 젊은 여자가 험한 얼굴로 다가와 다짜고짜 따져 묻는다. 왜 남의 집 사진 찍느냐고. 다방에 있는 분께 허락 받았다고 하니, 자기가 주인인데 무슨 소리냐고 더욱 핏대를 세운다. 뭔가 좀 해명하려 해도 집채만한 화물차들이 쌩쌩 달리는 바람에 내 귀에도 내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맹물다방 … 필터커피 … 언제부터…’ 배달일 바쁜데 이런 한심한 소리를 듣다니 하는 표정을 짓더니 주인여자는 스쿠터를 타고 또 어딘가로 쒱 가 버린다. 나는 그네가 사라지고 나서야 막상 질문도 못했구나 싶었다. 그때 마침 아까 그 영감님이 다방 문을 나선다. “영감님 왜 이 집이 맹물다방인가요?” “요즘 커피 말고 옛날 커피라고 맹물다방이지.” “한데, 이 집도 다른 다방 커피랑 다를 게 없는 커피던데요.” “그야 그렇지만, 그런 맘으로 마신단 거지.” 이름 치고는 경륜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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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용의 스쿠터 다방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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