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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11 21:34 수정 : 2008.06.11 21:34

휴일의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기로 했다. 사진 김도훈.

[매거진Esc]김도훈의 싱글라이프

주말이면 공덕동 마포대로 일대는 영화의 무대가 된다. 런웨이급 카페 종업원들이 아름다운 파티오에 잉글리시 애프터눈티 세트를 내놓는 로맨틱 코미디의 무대는 아니다. 그보다는 음습한 공포영화 무대에 가깝다고 하는 게 옳겠다. 예를 들면 대니 보일의 <28일 후>나 윌 스미스의 <나는 전설이다> 정도랄까. 주말 마포대로 일대는 드문드문 오가는 시내버스를 제외하면 인간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좀비영화의 무대로 돌변한다.

텅 빈 거리에 본격적으로 좀비가 출몰하는 건 오후 서너 시다. 근처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싱글족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나둘씩 대로로 쏟아져 나온다. 사람 머리라도 뜯어먹겠다는 눈빛이 퀭하기 그지없다. 내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삼십대 패셔니스타라는 자아도취적 위엄을 버리고 슬리퍼를 질질 끈 좀비 군단에 합류하기로 마음먹는 건 냉장고를 여는 순간이다. 시끄러운 하얀 전기 냉동박스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처절하게 시어 빠진 유산균 배추절임 덩어리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나를 포함한 오피스텔의 싱글족들은 영혼을 잃고 대로변의 문 연 식당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추악한 꼬라지를 가장 스타일리시하게 면하는 방법은 ‘브런치 회동’이다. 그러나 오리지널 된장남을 자처하며 지난 8년간 스타벅스에 꼬박꼬박 돈을 바쳐온 나에게도 브런치 문화는 도무지 실행에 옮기기 힘든 놀이다. 대부분이 기자 나부랭이인 친우들은 목요일 마감과 금요일 음주가무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일요일을 ‘숙면의 날’로 지정했다. 핸드폰은 모조리 꺼져 있다. 게다가 캐리 브래드쇼도 유부녀가 된 이 시국에 더이상 서울을 뉴욕의 소호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도 좀 서글픈 일 아니겠나.

그러니 싱글족의 일요일 식사는 대개 몇 가지 코스로 제한된다. 첫번째 코스. 직접 만든 요리다. 물론 바지락이 듬뿍 들어간 봉골레 스파게티 같은 걸 매 주말 만들어 먹을 만한 싱글족 따위는 패션지 피처기사에나 존재할 따름이다. 대부분의 싱글족이 일요일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만드는 요리는 참치캔 김치찌개나 지난 목요일 만들어놓고 깜빡 잊었던 묵은 카레다. 그것도 냉장고에 뭔가가 있기나 해야 가능한 일이다. 두번째 코스. ‘우리 동네 가게’ 전단지에 빼곡히 들어찬 배달전문 음식점들이다. 문제는 1인분을 황송하게 배달해 주는 음식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거다. 세번째 코스. 결국 대로변 음식점을 찾아 헤매는 한낮의 좀비로 전락하는 방법밖엔 없다. 그러나 세번째 코스의 문제는 고깃집을 제외하면 일요일에 문을 여는 식당이 거의 없다는 거다. 진정한 독신자라면 혼자서도 고깃집에서 당당하게 주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고깃집에 들어가 “꽃등심 1인분!”을 외친 뒤 홀로 해치울 만한 담력이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도 아니더라.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결국 해결책을 찾았다. 나는 금요일 퇴근길엔 언제나 근처 마트나 정육점에 들러 최고급 한우 꽃등심과 차돌박이를 반 근씩 산다. 느지막이 일어난 일요일 오후에 햇반을 데우고 등심을 굽는다. 익어가는 등심 냄새가 원룸 오피스텔에 가득 차기 시작하면 반쯤 감긴 눈꺼풀도 절로 뜨인다. 이걸 몇 주간 반복했더니 적절한 단백질 섭취로 몸도 마음도 좋아지는 듯했다. 게다가 일요일 낮에 등심 굽는 독신남이라니. 이거 왠지 로맨틱하잖아. 아름다운 일요일 만찬을 나누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진 지난 주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을 또다른 마포 독신남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 문자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일요일 낮에 등심 굽는 30대 독신남이라. 왠지 모르게 시대적 저항정신이 느껴지는군.”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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