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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손님 골려먹는 재미 소 내장탕 끓여먹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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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한국인 빼닮은 이탈리아인들의 음식문화…사골로 소스 만들고 소꼬리는 찜이나 구이로 시칠리아는 이탈리아를 떠나 전 유럽의 휴양지다.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고급 빌라들의 적지 않은 수가 외국인들 소유다. 특히나 유럽연합 출범과 함께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이 쉬워지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전에는 외국인들이 이탈리아의 부동산을 사려면 거의 무슨 조약이나 휴전협정에 버금가는 서류뭉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긴 농담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집을 사려면 트럭 석 대가 필요하다. 한 대는 이삿짐, 한 대는 구비서류, 한 대는 돈!” 마지막 ‘돈’은 당시 이탈리아 화폐의 액면 가치가 세계적으로 낮은 리라(현 유로의 2천분의 1밖에 안 됐다)여서 생겨난 풍자다. 마피아는 모르는 ‘스파게티 알라 마피아’어쨌든 시칠리아엔 부동산 거래가 쉽든 어렵든 휴가철이면 외국인이 득실거렸다. 내가 일하는 시칠리아의 깡촌 식당에도 이들이 밥을 먹으러 몰려왔다. 제일 만만한 건 역시 미국인이다. 그들은 종종 세계의 경찰처럼 행동하지만, 역시 ‘세기의 멍청이들’답게 행동했다. 특히나 이민자의 후손들은 마치 고향 식당을 찾듯 감회에 서려 약간 거들먹거리며 식당에 들어섰다. 마치 옛날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종종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행인 것은 요란한 하와이안 셔츠를 걸치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예약 전화를 받았을 때 영어를 쓰지만, 성이 로시, 피카렐리, 보시 같은 이탈리아계라면 틀림없이 그들이었다. 돈은 많고 미각은 짧아서 그야말로 봉 취급을 받곤 했다. 다만, 홀 매니저가 곤란을 겪는 일이 많았다. 미트볼 ‘스파게뤼’가 없다는 걸 설득해야 했고, 생크림 파스타도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하긴, 어떤 이는 피자가 없다고 화를 벌컥 내기도 했으니까. 이탈리아에서 피자를 파는 곳은 대중식당이며, 고급식당에서 피자를 찾는다면 큰 결례가 된다는 걸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이들 미국 손님들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주방장 주세페는 알고 있었다. 코딱지만한 미니햄버거를 만들어 빅맥을 비꼰 ‘리틀맥’을 만들어내거나, 피자를 찾는 손님에게 미니피자의 일종인 피체티나를 상에 올렸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모두 마피아거나 마피아 협력자라고 착각하는 이들을 위해 ‘스파게티 알라 마피아’라는 메뉴도 만들어냈다. 뭐, 별건 아니었다. 마피아의 뭔가 누아르풍의 음울한 느낌을 살려 카카오 분말로 면을 반죽하고 비트 초콜릿(쓴맛의 무가당 초콜릿)을 소스로 쓰는 그만의 파스타였다. 나중에 주세페는 아예 초콜릿과 카카오를 주제로 한 요리책을 펴낼 정도로 이 방면의 고수였으니, 엉터리 메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여튼 이런 메뉴를 들고 홀에 나간 주세페는 한껏 폼을 잡았다. 이탈리아 사람 특유의 형식미를 과시하는 거였다. 마치 파바로티가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열창하기 위해 무대에 걸어 나가는 듯한 자세 말이다. 그러고는 왼손을 길게 뻗어 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는다. 그러면서 짧은 영어로 환영사를 뱉어냈다. “…고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향이라니. 역시 주세페는 천재였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굴도 못 본 증고조 할머니와 브루클린 뒷골목에서 아일랜드 놈들과 처절한 세력다툼을 벌이셨을 증증고조 할아버지를 상상하느라 다들 숙연해졌다. 너희들은 고향에 온 거라구. 자자, 맘껏 마시고 먹고 고향의 증고조 할머니 솜씨를 느껴 보라구. 일단 흥분부터… 못말리는 다혈질도 비슷 그날 매상은 늘 기록적이었다. 화이트와인을 맥주처럼 마셔댔고, 취기가 올라 흥이 난 누군가는 독한 그라파를 위스키 삼아 마셨다. 누군가 “케 벨라 로사~”로 시작하는 ‘오 솔레 미오’를 흥얼거리면 아예 합창의 바다가 넘실거렸다. 주방에선 이 광경을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니, 시칠리아 한바닥에서 웬 나폴리 칸초네란 말인가. 하긴, 베네치아의 곤돌라잡이들도 나폴리 칸초네를 멋들어지게 불러 팁을 뜯어내곤 하는데 뭘. 손님들이 모두 물러간 건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이런 날은 요리복을 벗으면 ‘써걱’ 하고 소리가 난다. 말라붙은 소금이 떨어지는 소리다. 샤워라도 제대로 하고 자야 하지만, 빗물을 받아놓은 물통은 쉭쉭 소리를 내고 있다. 물이 떨어져 간다는 뜻이다. 이럴 땐 그저 얼굴의 소금기나 걷어내고 자는 게 상책이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겪는 혼란은 꽤나 극적이다. 이 땅이 한국인지 이국인지 혼동할 만큼 기시감까지 들 정도로 일치를 보여주는가 하면, 결국 이탈리아도 정 뚝뚝 떨어지는 서양이라는 확인을 하게 된다. 그 ‘정 떨어지는’ 얘기까지 해서 피곤하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는 그저 지난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한국에 깨지고 왜 그 난리를 피웠는지, 이탈리아 음식에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수다를 떨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축구 얘기를 해서 안 됐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이 패배에 수긍할 수 없었던 건 너무도 당연하다. 왜? 세계 최강이라는 브라질이나 프랑스에 깨져도 그들은 똑같은 소리를 할 것이니까. 한마디로 저 잘난 멋에 사는데 극동 귀퉁이의 새알만한 나라에 졌으니 오죽했을까. 그렇다. 그 나라나 한국이나 제 잘난 멋에 산다. 종종 그 나라에서 이탈리아 녀석들과 싸울 일이 있었는데, 얘들은 먼저 흥분부터 하고 본다. 다혈질이라면 한국인도 한가락 하니 싸움이 가관이다. 둘 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죽일 듯이 노려본다. 나중에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일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쉽게 화해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여간 두 반도나라 사람들이 붙으면 요즘 유행한다는 이종 격투기는 애들 장난인 것이다. 이런 유사성을 어떤 이는 자연환경이 비슷하다는 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땅덩어리의 7할이 산이며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건 대개 아는데 이것뿐만이 아니다. 화산섬인 시칠리아에 살아 보면 어쩌면 그렇게 제주도 같은지 기가 막힐 지경이고, 이탈리아의 동해안으로 넘어가다 보면 마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이나 미시령을 넘는 짝이다. 완만하게 고도가 높아지다가 급격하게 높은 산이 나오고, 곧바로 좁은 평야와 바닷가가 나오는 것이다. 얘기가 음식으로 넘어오면 이건 숫제 판박이다. 생선요리를 즐기는 것은 물론이고, 만두며 팥죽, 소꼬리탕, 내장탕 같은 요리가 있다면 믿으시겠는가. 침 넘어가는 만두부터 시식해 보자. 이탈리아 만두는 흔히 ‘라비올리’라고 한다. 고기와 채소로 속을 채우는 것도 비슷한데, 단백질 발효식품을 넣는 데 이르면 아예 쌍둥이다. 바로 치즈와 두부다. 재료가 우유냐 콩이냐는 차이뿐이다. 만둣국도 있다. 사골 국물을 내듯이, 이탈리아에서는 육수를 내어 작은 만두를 동동 띄워 먹는다. ‘토르텔리니’라고 하는 라비올리의 일종이다. 이뿐이랴. 평양만두 같은 왕만두도 있다. 이건 ‘라비올로니’다. 팥죽엔 새알 대신 동그란 파스타를 팥죽 있다는 말도 금시초문일 터. 팥을 잘 갈아서 쑨 다음 새알 같은 걸 넣어 먹는 것도 똑같다. 새알 대신 아넬로(반지)라는 이름의 동그란 파스타를 넣는 게 다를 뿐이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 필자는 단단히 작정한 게 있다. 소나 돼지 내장을 맘껏 먹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 비싼 양이며 소꼬리 같은 걸 서양에서는 고양이 먹이로 쓰거나 버린다는 얘기를 주워들었던 거다. 헛다리 단단히 짚었다. 미국에서나 일어나는 먼 나라 소식이었던 거다. 이탈리아는 하여간 그런 것까지 닮았다. 소나 돼지, 닭 따위를 잡으면 알뜰하게 모든 부위를 다 먹는 것도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사골로 소스를 만들고, 소꼬리는 찜이나 구이로 먹는다. 내장도 탈탈 털어 탕을 끓인다. 고추와 토마토를 넣어 벌건 색을 띠는 게 내장탕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겨울에 추위를 이기는 스태미나 음식으로 먹는 것까지 쏙 뺐다. 올겨울도 우리가 안심하고 소 내장탕을 먹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고기가 들어오면, 뼈도 오기 마련이고, 내장이 들어오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 광우병 이전에 우리가 엄청난 양의 미국산 뼈와 내장을 수입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까봐 붙이는 말이다.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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