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11 23:24
수정 : 2008.06.1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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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군 이원면 관리 바닷가의 구멍바위. 구멍을 지나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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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기름 벼락’에 쓰러진 태안군 이원면 관1리 볏가리마을의 희망은 체험객들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 사고 6개월째를 맞은 태안. 농어촌 체험마을로 인기를 끌던 이원면 관1리 볏가리마을은 평화로워 보였다. 논에선 모내기 마무리 작업이, 밭에선 마늘 수확이 한창이다. 소원을 빌며 구멍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구멍바위도, 주변의 모래밭도 갯벌도 언제 기름파도의 직격탄을 맞았냐는 듯 깨끗하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주민들이 추위를 견디며 돌 하나, 모래 한 줌까지 정성을 다해 닦고 씻어낸 결과다.
뜨뜻미지근한 대책에 해상시위도 별러
그러나 거리 분위기와 주민들 표정은 어두웠다. 사라진 듯이 보였던 시커먼 기름 찌꺼기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가슴속에 쌓여 있었다.
“뭐 하나 해결된 게 있남유. 정부 쪽이구 삼성이구 그저 기다리라구만 했지 제대로 대책 하나 내놓은 게 없시유. 속 터져 못 살겄시유.” 모내기를 끝낸 논을 살펴보던 볏가리마을 추진위원장 한원석(70)씨가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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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가리마을 소나무숲에 만들어 세운 솟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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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가리마을은 2003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농촌체험 행사를 시작한 이래 해마다 1만여명의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다. 바닷가에 접한 농촌마을의 풍습을 재현하고 염전·갯벌·농산물 수확 체험 등 각종 행사를 펼쳐 왔다. 도시민들의 방문이 급속히 늘어나던 때에 ‘기름 벼락’을 맞았다.
“아주 발길이 딱 끊어졌시유. 3월까지는 좌우간 전화 한 통화 읍더라구유.” 해마다 음력 1월14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펼쳤던 볏가리 세우기도, 염전 체험용 수차 돌리기도 중단됐다. 대를 이어 바다에서 가꾼 굴 양식장은 “딱 제철에” 만신창이가 됐다.
주민들은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어진 뒤로도 해안의 마무리 방제작업에 몰두했다. 인건비도 나온다는 말에 다른 일 제쳐두고 방제에 매달렸다. 전 주민이 격일로 나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걸레로 바위틈 닦는 일을 했다. 그러다 지난 5월26일, 태안 주민들은 작업을 중단했다.
이원면의 한 식당 주인이 말했다. “영국 보험사에서 인건비 다 나오니까 걱정 말고들 해라, 해서 생계를 팽개치고 방제작업에 나섰는데, 몇 달째 소식이 없시유. 전기료두 못 내게 생겼는디 인자 우린 워치케 산대유.” 군청과 방제업체 관계자를 만나 따졌지만, 답변이 없자 방제작업을 멈춘 것이다.
한원석씨는 “6개월 동안 생계지원비로 가구당 50만~300만원씩 두 차례 받은 게 전부”라고 말했다. 관1리 주민 정원영(72)씨는 “마을에 대대로 전해 온 10만평 굴밭이 무허가 양식장이라서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니 환장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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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바위 옆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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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9일 태안군 8개 읍·면 주민 1000여명은 서산 대산읍의 삼성정유 공장 앞으로 몰려가 삼성의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는 삼성” 쪽에 답변을 요구했다. 태안군의회 의장과 보상대책위원장 등 주민 4명은 따로 서울 이건희 전 회장 집 앞에서 12일간 단식 시위를 벌였다. 지난 5일 “일주일 안으로 답변을 주겠다”는 답을 듣고 단식을 멈췄다.
태안 주민들은 “6월 중순까지 납득할 만한 답변이 없을 경우 어선을 동원한 해상 봉쇄시위를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태안 주민 전체가 겪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나마 볏가리마을이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건 “조금씩이나마 이어지는 방문객들”이 있어서다.
볏가리마을 사무장 손영철(42)씨가 말했다. “한때는 낙담하기도 했지만, 얼마 전부터 각 단체, 학교들과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일부러 우리 마을을 찾아줘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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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가리마을에선 마늘캐기 체험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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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9일과 30일 볏가리마을에는 오랜만에 어린이들의 해맑은 재잘거림이 울려 퍼졌다. 1박2일 일정으로 이곳을 찾은 서울 상도4동 ‘공동육아 해와달 어린이집’ 16명의 원아들이다.
두 명의 교사와 함께 온 어린이집 김지나(46) 원장은 “체험거리가 많고 주민들이 친절해 해마다 이곳을 찾는다”며 “이번엔 기름유출 때문에 걱정했는데 직접 와 보니 해안도 깨끗하고 모든 게 정상적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볏가리마을에서 요즘 체험할 수 있는 행사로는 마늘 캐기, 염전 체험, 인절미 만들기, 갯벌 포장마차 타고 구멍바위와 갯벌 찾아가기, 동물농장 체험 등이 있다. 대형 식당과 세미나실도 갖췄다.
당나귀에서 칠면조까지 동물농장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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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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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동물농장이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당나귀·타조·염소·양·토끼·사슴·공작·칠면조 등 23종에 이르는 동물들의 생태를 배우며 관찰하고 먹이를 준다. 동물농장 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는 거닐 만한 멋진 숲길이 이어진다. 소원을 적은 종이를 한지 주머니에 넣어 매달아 두는 ‘소원의 숲’을 거쳐 구멍바위가 있는 바닷가로 내려가는 산책로다.
한원석 추진위원장은 “어패류 채취 체험을 빼고는 모든 체험이 가능하다”며 “이게 다 각지에서 찾아와 고생한 자원봉사자들의 눈물겨운 봉사활동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태안=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이병학의 마을을 찾아서’ 연재를 이번 호로 마칩니다. 네이버 ‘이병학의 맛있는 여행’ 코너에서는 계속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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