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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샤넬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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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나지언의 싱글라이프
폐물을 훔치러 온 쥐새끼처럼 미친 듯이 옷장을 뒤졌다.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치르는 ‘엄숙한’ 의식이다. 엄마가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을 끝내고 들어오기 전에 빨리 찾아야 한다. 분명 엄마의 옛날 사진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뭐 하냐?” 엄마가 들어오셨다. 엄마의 시선은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닿은 내 손엔 아주 오래된 샤넬 2.55 백이 들려 있었다. 엄마는 나를 낳은 이후로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했다. 서울에 올라왔더니 여동생이 소더비 매장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소유였던 희귀 와인을 본 사람보다 더 예리한 눈빛으로 물건의 역사와 가치를 한순간에 탐지해내는 게 느껴진다. 어깨를 으쓱하며 “이거 엄마 옷장에서 찾아낸 거야”라고 말하자 동생이 공모자의 음흉한 표정으로 제 방에 다녀온다. “나도, 이거. 엄마가 옛날에 들던 빈티지 디올 백.” 샤넬 백과 디올 백을 가졌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는 잠시 숙연해졌다. 시집도 못 간 주제에 엄마의 백을 뺏다시피 가져온 ‘몹쓸’ 딸들이라니. 우린 부모님의 6년째 소원인 ‘올해 안에 시집가기 프로젝트’에 좀더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몇 달치 월급을 차압당하면서 산 명품이 아니라 엄마가 주신 물건이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들은 더 흥분하는 것 같았다. “우와, 빈티지라 더 멋스럽다.” “사실 요즘 나온 샤넬 2.55 백은 너무 화려해서 별로잖아.” 친구들의 호들갑을 듣고 있으니, 굳이 샤넬 백이 아니더라도 20년 전 엄마가 쓰신 물건을 대를 이어 쓴다는 사실 자체가 존경할 만한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한 친구는 ‘빈티지 유행’에 힘입어 엄마가 가장 아끼신다는 빈티지 오메가 시계를 차고 다니며, 또 한 친구는 아버지의 30년 된 카라멜 스웨이드 소재의 블루종을 어깨 너비를 줄여 입고 다닌다. 물건은 대를 이어 가치가 부활되며, 그 물건을 쓰는 사람은 전 세대의 세월과 경험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안은 채로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소비한다. 빈티지 유행 덕분에 우리는 부모님의 젊었을 적 소비 패턴과 취향, 그리고 청춘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됐다. 부모님이 수덕사로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국가의 앞날에 대한 중대한 기자회견이라도 곧 할 사람들처럼 어색하고 경직된 모습이었는데, 부모님이 옛날엔 이렇게 멋쟁이였구나 싶었다. 아빠는 카멜색 코트에 분홍색 터틀넥을 입고 있었고, 엄마는 와이드 팬츠에 초록색 스웨이드 토트백을 들고 있었다. 이어진 사진 속에는 아메리칸 어패럴 스타일의 수영복, 품이 넓고 소매가 짧은 마르니 스타일의 재킷, 카시오 메탈 시계 등 요즘 유행 아이템들이 잔뜩 있었다. 부모님도 유행을 좇는 청춘이었을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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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언의 싱글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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