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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책은 눈에 보이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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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서진의 뉴욕서점 순례5
유일한 음식 전문 ‘키친 아트 앤 레터스’에서 마지막 날을 장식하다
지난 줄거리
행방불명된 소설가 서진씨를 찾아 편집자 이선제는 휴가를 얻어 뉴욕의 서점을 뒤진다. 마침내 사흘째 되던 날 둘은 만나게 되고, 서진씨는 자신이 찾고 있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줄 책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이선제는 서진씨의 부탁에 따라 계속 서점을 방문하면서 세상의 책이 모두 사라진다면 보관할 세 권의 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마침내 서진씨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
“이 책들은 다 어디서 구한 거죠?”
서진씨가 머무는 곳은 작은 부엌과 소파, 책상이 전부인 좁은 스튜디오다. 침실도, 서재도 따로 없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책등과 표지가 너덜너덜한 책도 있고, 새것처럼 보이는 책도 있다. 책 중간 중간에 포스트잇이 끼워져 있다. 찬찬히 책을 들여다보니, 도서관 마크가 찍혀 있는 것도 보인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불타더라도, 사람들이 구하고 싶은 세 가지 책의 리스트를 모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서진씨가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스친다.
“설마 그 리스트의 책을 모으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 책들을 모으면 굉장한 컬렉션이 될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책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끄덕없을 겁니다.” Day 5 어퍼 이스트 & 모닝 하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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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유일한 음식 전문 서점 키친 아트 앤 레터스. 40% 이상이 수입된 책일 정도로 구비 목록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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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아트 앤 레터스 음식에 관한 책은 요리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음식에 관련된 역사·여행·철학, 심지어 소설책까지 모두 섭렵하고 있는 ‘키친 아트 앤 레터스’는 뉴욕에서 유일한 음식 전문 서점이다. 원래 출판사에서 일하다 사업을 구상하던 중, 음식 전문 서점을 차리게 됐다는 나크 맥스맨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로 카운터를 지킨다. 뉴욕에 수많은 레스토랑이 있는 탓에 이곳의 손님 중에는 유명한 요리사나 요리 비평가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외국에서 뉴욕을 방문하는 요리사들도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40% 이상의 책이 해외에서 수입된 책일 정도로 좀더 다양한 요리책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한국 음식에 관한 책도 구하고 있는데 말이야. 물론 영어로 된 것이어야 하겠지만 … 하나는 기본적인 한국 요리에 대한 레시피를 다룬 책이었으면 좋겠고, 다른 하나는 젊은 요리사의 한국 퓨전요리 책이었으면 좋겠어.” 나크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금세 한국 요리책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 역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그 책을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가지고 싶은 집착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음식 전문 서점을 차리게 됐어요?”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루는 서점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미스터리나 여행, 건축 관련 서점은 이미 있어서 음식 서점을 선택했어. 물론 나도 요리를 무척 좋아하고.” Kitchen Art & Letters/ 1435 Lexington Ave/ kitchenartsandletters.com 중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훔친 적이 있다. 일상을 탈출해서 뭔가 더 먼 곳으로 향하려는 갈매기 조나단의 이야기가 가슴 벅찼다. 그 책을 당장 갖고 있지 않으면 다시는 그 감동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훔친 갈매기의 꿈은 내 책상 서랍 어느 구석에서 몇 년 동안이나 썩어갔다. “서진씨, 그냥 저하고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요. 이런 식으로 그 책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소설은 안 써지면 나중에 써도 돼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책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올해만 해도 뉴욕에서 문을 닫은 서점이 세 군데나 돼요.” “대부분의 책은 아마존닷컴에서 다 살 수 있다고요.” 서진씨는 나를 쳐다본다. 내가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절판된 책은 살 수가 없어요. 중고 서점의 많은 책들이 절판된 희귀본들인데, 그런 것들이 사라지도록 어떻게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있죠? 그중의 어떤 책은 한 사람에겐 그 어떤 것을 주고라도 바꿀 수 없는 책일 수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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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어퍼이스트는 상류층이 많이 산다. 부자들은 ‘반스앤노블’ 같은 대형 서점보다 클래식한 코너 북스토어를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코너 북스토어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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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 북스토어 센트럴 파크 동쪽 매디슨, 파크 애비뉴를 비롯한 어퍼이스트 지역에는 뉴욕의 상류층이 주로 산다. 아파트 입구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어맨이 기다리고 있고, 버스나 지하철 따위는 한 번도 타보지 않았을 법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반스앤노블’ 같은 대형 서점보다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코너 북스토어를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걸어서 가뿐히 갈 수 있어서 좋은 서점 말이다. 오래된 약국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탓인지 카운터와 구식 레지스터, 오래된 천정이 눈에 띈다. 주로 최근에 나온 문학서적과 여행·요리책, 어린이책 등을 골고루 갖췄다. 가게 한구석에 자리 잡은 게시판에는 동네 사랑방처럼, 근처에서 열리는 행사 홍보, 중고 물건 판매 등의 전단이 붙어 있다. 이곳의 주인인 레이 셔먼씨는 한창 직원과 함께 서가의 책을 점검하고 있다. 주인이 리스트의 책 제목을 부르면 점원이 책을 찾고, 위치가 틀리면 다시 꽂아놓는 형식이다. 분실된 책이 있는지도 물론 살펴볼 것이다. “혹시 리스트에 없는 책이 꽂혀 있는 경우는 없나요?” 주인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요, 간혹 산 적이 없는 책이 서가에 있기도 해요. 우리가 산 책이 아닌 경우도 있고 … 그런데 그걸 왜 묻죠?” The Corner Bookstore/ 1313 Madison Ave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소파에 앉아 서진씨가 수집한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본다. 거실 한구석에 담요를 깔고 자고 있는 그가 보인다. 머리맡에는 책 한 권과 안경이 놓여 있다. 꽤나 소중한 책인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다가간다.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고 귀를 가까이 대 본다. 다행히 아기처럼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넘었다. 두 시간만 기다리면 동이 틀 테고, 지하철과 버스가 돌아다닐 것이다. 나는 서진씨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오늘이 뉴욕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밤늦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도, 나는 서점을 이리저리 배회할 것이 틀림없다. 세상의 고민을 모두 풀어줄 수 있는 책 따위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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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사이드 북숍의 주인 아멜리아 린든.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의 책이나 정치·시사 관련 책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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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사이드 북숍 컬럼비아대학이 자리 잡은 110번가에서 120번가 서쪽 모닝 하이츠 지역은 이곳에 사는 사람이거나 학생이 아니라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맨해튼의 어느 지역 못지않게 흥미로운 음식점과 건축물, 특히 성요한 성당을 중심으로 고풍스런 교회가 여럿 있다. 1970년대 컬럼비아대학은 학생운동의 메카였고 바로 길 건너편에 위치한 파피루스 서점은 진보적인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원래 주인이 가게를 접으면서 서점에서 일하던 아멜리아 린든이 가게를 인수하게 됐다. 2004년 새로운 이름으로 문을 연 모닝사이드 북숍은 컬럼비아대학을 비롯한 커뮤니티 중심의 서점으로 탈바꿈했다. 어린이를 위한 책읽기 행사도 자주 열리고 주변에 사는 작가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자주 갖는다. 그러나 아직도 진보적인 성향은 남아서,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의 책이나 정치·시사 관련 책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세 가지 책이라…” 새로 문 열기 전부터 이곳에서 일을 했다는 앨리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책의 제목을 적어 내려간다. “음 … 만화책을 선정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캘빈앤홉스의 만화책이 리스트에 실려 있다. “뭐, 책이 사라지면 굉장히 심심해질 테니까, 따라 그려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Morningside Bookshop/ 2915 Broadway/ morningsidebooksho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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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서점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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