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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02 17:43 수정 : 2008.07.02 18:55

이태원 시장에서 발견한 츠모리 치사토 원피스.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츠모리 치사토 원피스잖아. 입이 딱 벌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소니아 리키엘 원피스가 현현하게 빛을 발한다. 바로 옆에 걸린 건 꼼 데 가르송이 분명하다. 이태원 시장 첫 나들이는 경이의 연속이었다. 온갖 디자이너 명품들의 올 시즌 제품들이 빽빽하게 들어 찬 모습이 너무나도 환각적이어서 내가 마약을 했나 싶었다. 낡은 시장 건물의 퀴퀴한 냄새와 너절한 아우라는 금세 사라졌다. 짝퉁 명품 원피스를 고르는 여인들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패션지 에디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패션지 에디터가 월급이 뭐 그리 많아서 명품을 사겠니. 시즌 첫 상품이 나오면 다들 이태원으로 달려가는 거지 뭐”. 확실히 그랬다. 이태원 시장에서 츠모리 치사토와 소니아 리키엘의 신상을 찾을 정도의 안목이라면 시장에서 짝퉁 루이비통 스피디백을 찾아 헤메는 학생 초년생들과는 일단 체급이 틀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맘 편하게 둘러볼 남성복 짝퉁 매장은 이태원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길을 걷다가 “손님. 폴 스미스 있어요”라고 은밀하게 외치는 점원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를 따라 지하의 소매상으로 들어갈 용기는 도무지 나질 않았다. 안 봐도 뻔하다. 옆에 찹쌀떡처럼 들러붙어서 이것저것 뻣뻣한 셔츠를 입혀 놓고는 너무 럭셔리하고 멋스럽다며 맘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겠지. 나중에 들르겠다고 하면 눈을 흘기며 바닥에 침을 탁 뱉을지도 몰라. 아, 소심한 쇼핑객에게 이태원 지하의 은밀한 개인 상점들은 사자 소굴이나 다름없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즐겨찾기에 저장해 둔 인터넷 쇼핑몰을 열었다. 에디 슬리먼이니 드리스 반 노튼, 라프 시몬즈, 닐 바렛 혹은 크리스 반 아쉐, 꼼 데 가르송의 신상 짝퉁이 툭툭 튀어나온다. 작년만 해도 상황은 이러지 않았다. 기껏해봐야 D&G, 엠포리오 아르마니, 구치, 마크 제이콥스처럼 널리 알려진 브랜드의 짝퉁들이 간간이 보였을 따름이다. 남성 쇼핑몰의 짝퉁 취향도 마침내 진화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백화점 면세점에 입점한 유명 브랜드가 아니라 지금 가장 젊고 뜨거운 남성복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내세워 짝퉁을 판다. 게다가 몇 달 전에 런웨이 무대에서 선보인 따끈따끈한 신상이다.

세상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신세계가 열렸구나. 이태원 지하상가에서 인디안 여인과 달과 늑대가 그려진 츠모리 치사토의 저지 드레스를 발견한 그녀들도 이런 기분이었을 거야. 입이 찢어진 채 밤새도록 쇼핑몰을 돌아다닌 끝에 모 브랜드의 이번 시즌 체크무늬 셔츠와 반팔 피케 셔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문제는 장바구니 밑에서 번쩍이고 있는 ‘구입’ 버튼이었다. 도무지 눌러지지가 않았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캐리는 엘에이 근교에 ‘펜디 바게트 백’을 사러갔다가 그냥 돌아온 뒤 이렇게 말했더랬지. “펜디백들이 자동차 트렁크에 들어있는 걸 보는 순간, 너무 초라해 보였어”. 그래. 그 여자 말이 맞아.


김도훈의 싱글라이프
나는 결국 지고 말았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으니 맛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호기심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틀 만에 온 셔츠는 단추 하나도 진품과 똑같이 카피했다는 쇼핑몰 운영자들의 설명과는 달리 한없이 초라하고 너절해 보였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싸 보였다. 옷을 벗자마자 꾸깃꾸깃 뭉쳐서 장롱 속에다 던져 넣고 씩씩거렸다. 나는 그보다는 자존심(!)이 더 비싼 인간이었나보다.

김도훈〈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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