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소설가 윤이형이 꿈꾸는 ‘믿거나 말거나’ 흥미진진 서재
왜 모든 서재는 네모난 방에 네모난 서재에 네모난 책들이 도열하듯 줄서 있어야 할까? 다른 서재는 없을까? 지난해 <셋을 위한 왈츠>를 내면서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 윤이형씨가 ‘믿거나 말거나’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나만의 서재”를 상상해봤다.
지하 벙커였으면 좋겠다. 마당 한가운데 낙엽으로 뒤덮인 낡고 빛바랜 오렌지색 문짝 하나가 놓여 있고, 그 문을 열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는 거다. 벙커는 꽤 넓고 책으로 가득하다. <매트릭스>의 탱크가 “기적 말고 다른 건 뭐가 필요해?” 하고 물었고, 내가 “Books. Lots of Books.” 하고 대답하자, ‘촥 촥 촥 촥 촥 촤르륵 촤르륵 촤르륵 촤르륵 턱 턱 턱 털퍼덕’ 하고 책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쌓인 것처럼. 벙커를 꽉 채운 책장은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흑요석이고, 칸마다 냉장 시스템이 내장되어 서재 전체 온도가 4℃로 유지된다. 냉장고와 똑같은 온도.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내용이든 간에 내게 ‘책’은 언제나 차가운 느낌을 주는 사물이므로, 실제로 차갑고 신선하게 보존하고 싶다.
서재 한쪽에는 작은 책상과 가죽 의자가 있고, 의자에는 관리인이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관리인은 안드로이드인데, <프린세스 메이커>의 큐브와 똑같이 생겼다. 도서관 사서와 집사, 그리고 독서 가이드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로봇. 하지만 이 로봇은 어디까지나 ‘무식 타파 은하연대’에서 실시한 이벤트에 당첨된 내게 보내진 자원봉사 요원이므로, 그에게 집안일을 하라고 시킬 권리는 내게 없다. 사실 그는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훨씬 빨리, 훨씬 많이 읽는다(로봇이니까 당연하다). 그의 인공두뇌엔 그동안 내가 읽어온 모든 책의 데이터와 나의 독서 취향, 무식한 정도가 입력되어 있다.
그는 날마다 서점에 나가 세상에 출판되는 책들 가운데 내게 맞는, 내게 필요한, 내가 읽어야 할 책을 선별해서 사온다. 대형서점의 검색 시스템처럼, 그는 서재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10초 이내에 알려주며(사실 서재의 가장 큰 문제는 찾는 책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가끔 책을 통해 인생상담도 해준다. 내가 “쓸 얘기는 있는데 글이 안 써져.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하고 고민을 토로하면, 그는 주저없이 카프카의 잠언집을 꺼내 “장애물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아마 장애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고 읽어준다. 내가 “우울해! 우울해!” 하고 징징대면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8권 92페이지를 펴서 내게 건네며 “기억 안 나? 너 만화방에서 이거 보다 의자에서 떨어졌잖아” 하고 상기시켜준다. 그는 내가 인문학과 사회과학 서적을 안 읽는다고 걱정하며 ‘무식한 당신을 위한 특효약’ 서가에 들여놓은 도서들을 소개하고, 새로 나온 소설들을 꺼내 보이며 “이 사람은 이런 것도 쓰는데 넌 때려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자극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그와의 독서토론이다. 책 한 권을 끝내고,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운 다음 그와 마주앉아 독후감을 나누는 시간. 나는 로봇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윤이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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