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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09 19:10 수정 : 2008.07.09 19:10

2008윔블던 테니스 결승에서 진, 로저 페더러.

[매거진 esc] 김중혁의 액션시대

당신은 어느 쪽을 응원할지 모르겠다. 여기 두 선수가 있다. 한쪽은 현재 1위 챔피언이다. 온화한 이미지의 이 선수는 얼굴도 멀끔하게(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느끼하게) 잘생겼다. 플레이는 우아하며 순발력도 좋다. 인터뷰를 할 때는 말도 참 잘한다. 사려 깊어 보이며 비유를 구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스포츠를 잘했다. 최고의 대회에서 다섯 번 연속 우승하였으며, 이번에 우승하면 연속 우승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챔피언과 맞서 싸울 선수는 완벽하게 다른 스타일이다. 그는 현재 2위, 도전자다. 그의 얼굴은 야수 같고 모든 플레이에 힘이 넘쳐난다. 우아한 플레이는 찾아볼 수 없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종횡무진 경기장을 뛰어다닌다. 근육질의 몸매를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난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 같다. 챔피언에 비해 나이도 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는 챔피언의 연속 우승을 저지하려고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을 응원할지 모르겠다. 챔피언, 혹은 도전자.

챔피언의 이름은 로저 페더러, 도전자의 이름은 라파엘 나달. 2008 윔블던 테니스 결승전의 이야기다. 나는 도전자를 응원하기로 했다. 이유는 사소하다. 라파엘 나달은 나와 같은 테니스 라켓을 사용한(다기보다 내가 나달이 쓰는 테니스 라켓을 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너무 강한 상대를 보면 무너지길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스포츠 경기를 볼 때는 약자를 응원하는 재미가 있다.

최고의 챔피언과 믿을 수 없이 강한 도전자가 맞붙은 2008 윔블던 테니스 결승전은 앞으로 10년간, 혹은 100년간 다시 볼 수 없을 최고의 명승부였다. 밤 10시에 중계를 보기 시작했는데 끝난 시간은 아침 5시였다. 경기 시간만 4시간 50분이었다. 윔블던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펼쳐진 결승전이었다. 재방송으로는, 하이라이트로는 이 지긋지긋하게 끈질긴 명승부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투였다. 경기는 간단하게 끝나는 듯했다. 도전자가 2 대 0으로 앞서갔다. 한 세트만 더 따내면 챔피언이 바뀐다. 그 순간 챔피언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챔피언의 고충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며 최근에는 라파엘 나달에게 번번이 졌기 때문에 또다시 질 수 없다는 부담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김중혁의 액션시대
나는 어느 순간 챔피언을 응원하고 있었다. 챔피언이 이기길 바랐다. 그가 이겨서 대기록을 세우고, 도전자를 물리친 뒤 계속 챔피언으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게 진짜 내 마음인지 모르겠다. 챔피언은 계속 챔피언으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강력한 도전자가 등장해 챔피언을 끌어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겠다. 결국 챔피언은 졌다. 4시간50분의 사투 끝에 졌다. 연승 기록은 중단됐다. 대회 시상식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챔피언을 응원하는가, 아니면 도전자를 응원하는가에 따라 한 사람의 세계관을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뒤죽박죽이었다. 당신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김중혁 소설가·객원기자 vonnegut@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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