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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니치 빌리지의 노천카페. 심하게 낭만적인 〈인 굿 컴퍼니〉의 장면이 자연스러운 곳이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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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필름의 거리 ⑥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인 굿 컴퍼니>의 노천카페에 앉아 로맨스 제멋대로 상상하기
<섹스 앤 더 시티>를 한참 보던 어느 여름 뉴욕행 비행기 표를 결제했다. 멋진 뉴욕남 때문이 아니라, 네 언니들처럼 내게도 뉴욕에 상주하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긴 비행시간 동안, 기내영화로 토퍼 그레이스와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는 <인 굿 컴퍼니>를 보며 도착 전 셀렘을 잠재웠다. 영화는 51살 광고이사 ‘댄’이 기업합병으로 26살의 상사 ‘카퍼’를 맞는다는 끔찍한 이야기. 게다가 애지중지 키운 딸내미 ‘알렉스’는 그 ‘작자’와 사랑에 빠졌단다. 상황하며 스토리하며 나무랄 데 없는 영화였다. 그리고 꼭꼭 간직해 둔 한 장면.
막상 풀어놓고 보면 사소한 장면인데 대략 이렇다. 뉴욕대에 다니는 알렉스가 노천카페에서 차 한 잔을 시켜두고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카퍼’. 둘은 이미 구면인 사이. 어느 정도 호감도 있던 남녀에게 이런 우연한 만남은 대략감사다. 반가운 인사가 이어졌고, 뭐, 결국 “같이 나갈까요?”라는 토퍼의 제안이 이어진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지나가다 아는 사람 만나는 게 뭐 대수냐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 생각해 보라. 현실은 꽤 냉혹하다. 해가 거듭할수록, 전기가 통하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완벽한 직장을 구하는 일보다 백분의 일은 어려우며, 혹여 그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순탄하게 연결될 확률은 이상적인 상사와 지낼 횟수의 만분의 일도 안 된다. 그러니, 혼자 고개 처박고 카페에서 책이나 뒤적거리는 동안 그런 상대를 마주친다는 건, 그건 정말 너무 영화잖아!
그래서 난 이 장면이 좋다. 의자에 앉아있던 알렉스가 카퍼의 아는 척에 고개를 까딱 들 때 그 각도가 심하게 낭만적이어서 좋고, 그날 비치는 햇살이 딱 로맨틱할 만큼 따가워서 좋고, 호감 있는 사람들끼리 건네는 상투적인 대화들이 마냥 간지러워서 좋다. 물론, 인정할 건 한다. <아메리칸 파이> <어바웃 어 보이>를 통해 주로 남자들의 성장에 관심을 둔 폴 웨이츠의 작품인 만큼 사실 <인 굿 컴퍼니>는 연애담이 아니다. 그런데 난 그 대수롭지 않은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어떤 로맨틱 영화보다도 로맨틱한 연애담으로 머릿속에 저장해 버렸다.
근육이 뻐근해질 정도로 장시간의 비행 후, 마침내 뉴욕에 도착해 친구를 만나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영화 속 배경이 된, 뉴욕대가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를 찾아갔다. 영화가 촬영된 ‘카페 레지오’는 1927년 창업, 뉴욕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고풍스런 카페다. 카라바지오 풍의 격조 있는 그림이 걸려 있는 앤티크한 실내 따위는 대략 패스. 재빨리, 알렉스가 앉아 있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라면 나도 단돈 2.75달러에 패키지로, 뉴욕에서 처음 낸 역사적인 카푸치노와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로맨스 제 멋대로 장시간 상상하기’를 구입할 수 있다. 마침, 옆 테이블에 혼자 책을 읽는 여자가 보인다. 친구와 함께 “그녀도 누가 아는 체를 해 주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수다를 떠는 동안, 새삼 이곳이 ‘섹스 앤 더 시티’의 뉴욕임을 깨닫는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유성용의 스쿠터다방기행’ ‘필름의 거리’ ‘여행의 친구들’을 이번 회로 마칩니다.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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