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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09 22:55 수정 : 2008.07.13 11:54

그날, 커피민주주의 국가의 에스프레소는 쓰디 썼다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체류 허가 연장을 위해 새까맣게 선 줄에서의 커피타임
게으른 공무원한테 도장 한 번 받기는 왜 이리 힘이 드나

유럽의 오래된 농담 하나가 있다.

공무원을 소재로 한 가장 짧은 거짓말은? 답: “공무원이 일하고 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런 농담에 박장대소하곤 한다. 유사한 체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의 업무 처리가 종종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모양이다.

속도 위반으로 걸린 뒤 불법 입국자로 몰리다

이탈리아 공무원들은 내게 재미있는 체험을 자주 안겨주었다. 최근에는 앞뒤로 꽉 막힌 경찰 아저씨들이 나를 웃기기도 했다. 올해 초 나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었다. 경관 죽여주는 시골 길을 달리던 우리 일행의 차를 사이드카가 막아섰다. 경미한 속도위반-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좀 머시기한 시속 180킬로미터로 밟던 중이었다-에 우린 어색한 웃음으로 대충 때우려 했다.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을 제시할 때만 해도 외국인 관광객들이니, 무사통과를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경찰들 눈초리가 사나워지는 거였다. 이탈리아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는 우리에게 그들이 영어로 물었다. “당신들 언제 이탈리아에 들어왔수?”

의아하던 우리는 곧 그 의심의 원인을 알아냈다. 여권에 출입국 스탬프가 없었던 것이다. 며칠 전, 공항을 들어올 때 출입국 심사 공무원이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수다를 떨면서 우리더러 손짓으로 어서 들어가라고 지시할 때 알아봤던 셈이다. 입국 기록이 없으니, 대여섯 달 전의 출국 기록만 남아 고스란히 몇 달 동안 불법체류를 한 것처럼 의심받기 딱 알맞았다. 겨우겨우 입국했던 비행기표 좌석딱지를 찾아 제시하고 풀려나기는 했으니 별 탈은 없었지만, 일행은 단단히 골탕을 먹은 셈이었다. 일행의 누군가가 이탈리아 공무원들을 성토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시절의 시칠리아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이탈리아의 여름 아침은 아직 캄캄하다. 서머타임-누군가 일광시간절약제라고 기막히게 번역한-을 하는 까닭이다. 나는 눈곱을 떼자마자 경찰서로 갔다. 어젯밤 식당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몸은 묵은 이불처럼 무거웠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외국인 체류 허가 연장을 하려면 새벽같이 줄을 서야 했다. 이탈리아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하급 노동에 종사하는 외국인들이 모두들 이 짓을 1년에 한 번 정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체류 연장 시기가 되면 소화가 되지 않고, 신경질이 늘며, 얼굴이 노래지는 증상이 발동한다. 고된 노동도 힘든 판에 경찰서에 가서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온 동네의 이름도 얄궂은 인종들이 모두 모이는 게 체류 연장 시기의 경찰서 마당 아침 풍경이다. 한자 이름의 중국인들, ‘~프(v)’로 끝나는 동구권 아저씨들, ‘은(n)~’으로 시작하는 특유의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 언니들 사이에 나도 끼었다. 인물 잘빠지고 입성 고운 미국인들은 내가 외면한 건지 못 본 건지 이런 대열에서 발견하기란 참 어렵다. 보름 이상을 머무르려면 누구나 체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흑흑, 제발 격론만 벌어지지 않기를

어쨌든 새벽밥 지어 먹고 선 줄인데도, 앞에 새까맣게 긴 줄이 보였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번호표 발행기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그저 줄을 서고, 이 와중에 새치기를 감시해 가며 창구의 경찰관이 제발 어제 축구경기 결과에 대해 동료들과 토론하지 않기만을 기대해야 한다. 만약, 그 경기의 두 번째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 오심 문제로 동료와 격론이 벌어지는 순간, 그 줄은 꼼짝없이 지체와 정체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인들은 격론이 벌어지면 일단 모든 손에 들고 있는 물체, 설사 그것이 하루가 급한 외국인의 체류허가 문서라도 내려놓고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흔들고 찔러대는 제스처를 해야 한다. 이런 광경은 길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하다가 화가 치밀면 휴대폰을 고개 사이에 끼우고 두 손으로 해당하는 제스처를 보여야 한다. 물론 영상전화가 아니어도 말이다. 내가 일하는 주방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라이팬 두 개를 양손에 쥐고 열심히 뭔가를 볶아대는 와중이어도, 주문서가 법정서류처럼 쌓여도 동료와 말싸움이 벌어지면 팬을 내려놓고 제스처를 한다. 이탈리아에서 당신이 주문한 파스타가 눌어붙었다면, 틀림없이 이런 ‘제조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시 경찰서 앞마당. 줄이 좀체 줄어들 생각이 없다. 으흠, 일 템포 디 카페(il tempo di caffe), 커피타임인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하루 종일 커피와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를 생산하는 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대륙이지만, 세계의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건 자신이라고 굳게 믿는 이탈리아인들이다.

이탈리아의 하루는 커피로 시작한다. 대충 눈을 비비고 세수하고 집을 나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피 한잔이다. 아침을 대개 먹지 않기 때문에 브리오슈나 코르네토(크루아상) 한 쪽과 카푸치노로 아침을 때운다. 오전 열시쯤에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점심 식후에 다시 한 잔, 오후에 한 잔, 저녁 먹고 한 잔…. 기본적으로 대여섯 잔의 커피를 마신다. 그 기다란 손가락 끝에 앙증맞은 에스프레소잔을 끼우고 멋진 손동작으로 커피를 마시는 이탈리아인들을 보면, 그 우아한 자태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커피잔은 또 얼마나 작고 아름다운가. 그 잔에 참새 눈물만큼 농축된 에스프레소, 그 위에 노랗게 올라앉은 크레마는 이탈리아의 상징이다. 그들은 미국식 드립커피를 햄버거처럼 경멸한다. 한국에서는 가루커피를 즐기고, 에스프레소 값이 5천원이라고 하자, 내가 일하는 시칠리아의 식당 주방장 주세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된 몸짓으로 대꾸했다.

“아니 아니, 그건 커피에 대한 모독이야. 어떻게 가루커피를 먹을 수 있지? 그건 전쟁터에서 군인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게다가 5천원? 커피는 평등한 거야. 이탈리아에서는 거지나 대통령이나 똑같은 커피를 마신다고. 길거리 커피나 로마의 커피나 다를 바 없지. 한 잔에 1천리라!”

이탈리아에서 커피는 일종의 민주주의다. 누구나 똑같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값이 싸다. 모든 물가가 올라도 커피는 가장 나중에 움직인다. 1천리라는 0.5유로쯤 한다. 내가 이탈리아에 살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커피 한 잔은 1천리라였다. 물가가 크게 올라 요즘은 0.8유로(약 1200원) 정도 한다. 관광지 바가지 카페에서도 에스프레소라면 2.3유로 정도밖에 안 한다. 무슨 말이야? 난 커피 한 잔에 5유로나 냈다고. 이렇게 항의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귀족처럼 테라스에 앉아 우아하게 날라다 주는 커피를 마셨다. 경관 좋은 테이블에서 마시는 커피와, 바에 서서 마시는 커피의 값이 다르기 때문이다.

꼭 붙는 질문 “방코 오 타볼라?”

관광지에서 커피를 시키면 꼭 붙는 질문이 있다. “방코 오 타볼라?” 서서 마실래, 앉아서 마실래 하고 묻는 것이다. 당신은 값이 싸서가 아니라, 그것이 일상이라는 의미로 방코를 선택한다. 그리고 팔을 비스듬히 그 방코, 그러니까 커피 바의 기다란 서비스대에 기대어 에스프레소 향을 슬쩍 맡아본다. 그 후 두어 마디쯤 그 커피에 대한 품평을 곁들여 홀짝 마셔없앤다면 완벽한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에서 커피에 대해 품평을 하는 것은 일종의 시민정신이자 어른이 되었다는 신호 같은 거여서 빠뜨릴 수 없다. 그리고 열서너개쯤 되는 엄청난 수의 커피 추출구에서 번개 같은 동작으로 커피 십수 잔을 뽑아내는 바리스타의 마술에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바리스타가 당신의 사생활을 잊지 않고 개입해주면 적당히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꾸해주는 센스도 필요하다. 이탈리아에서 동네 바의 바리스타는 곧 변호사요, 죽마고우요, 정신적 오른팔 같은 것인 까닭이다.

다시 경찰서 앞마당. 온갖 새치기 시도를 물리치고, 담당 경찰관이 동료들과 벌이는 토론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내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찰나 창구가 덜컹 하고 닫혔다. 점심시간이란다. 아무리 줄이 파스타 가락처럼 늘어서 있어도 그걸로 끝이다. 점심시간이란 건 곧 오늘 업무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체류허가 심사는 오전에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기자들은 내일부터 새로 줄을 서야 한다. 우리나라 은행의 번호표는 정말이지 인류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다. 나는 터덜터덜 거리를 걸어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이탈리아인처럼 방코에 기대어 서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 이탈리아인처럼 품평을 했다. “이 커피, 왜 이리 쓰지?”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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