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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지글 섭씨 50도? 한몫 챙길텐데 당신이 참아”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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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박찬일의 ‘시칠리아 태양의 요리’
여름시즌엔 해외관광객 초만원으로 해변 식당마다 복작복작
하루 16시간씩 중노동해야 하는 요리사들만 떡이 되었으니
여름이면 그야말로 시칠리아는 자글자글 끓는다. 지열은 폭발하듯 타올라서 급기야 섭씨 50도를 돌파한다. 설마, 사람 사는 동네에 50도라니! 온도계가 잘못됐겠지, 하고 동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앗, 문제의 그 요란한 제스처가 시작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쿡쿡 찌르는 그 동작 말이다. 당신이 로마에서 지갑을 소매치기당한 후 경찰에게 호소할 때 보이는 동작과 똑같다. 그 경찰의 뜻은 이렇다. ‘관광객 양반, 그거 별거 아냐 … 로마가 그렇지 뭐. 큰돈 아니면 당신이 참아. 걔들도 먹고살아야지’.
수영복 한 장만 챙긴 언니들의 창궐
이걸 시칠리아의 더위에 대입하면 딱 맞아떨어진다. “어? 그거 별거 아냐…. 시칠리아 더위가 그렇지 뭐. 죽지 않을 테니 당신이 참아.” 유럽 요리사들은 코르크 밑창으로 된 조리화를 즐겨 신는데, 워낙 발이 편하다 보니 이걸 신고 동네를 활보하기도 한다. 이 더위에 아스팔트 포장 위를 걸었다가는 신발 다 망가진다. 코르크에 콜타르가 붙어 난리가 나는 것이다. 다행히 이탈리아의 포장도로는 대부분 돌로 이루어져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족이지만, 신발이나 옷만 봐도 그 사회의 요리사 대우를 알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넝마 수준을 겨우 면한 조리복에 군화보다 못한 엉터리 조리화가 기본이었다. 유럽은 명품 수준의 제품이 흔하다. 하긴 유럽이야 대통령과 최고 기업 사장이 훌륭한 요리사를 친구로 둔 걸 자랑하는 사회 아닌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 시칠리아는 초만원이다. 전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 관광객들이 총출동하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해변의 여름별장은 대부분 외지 사람들 소유인데, 영국인과 독일 사람들이 꽤 많다. 주방이 펄펄 끓어도 이때는 땀을 바가지로 쏟으며 버텨야 한다. 얼마나 땀을 흘렸으면 일을 끝내고 옷을 말려서 털면 소금가루가 투두둑 떨어진다. 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독자도 있을 텐데 그런 일을 확인하는 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의 주방이라고 시원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원하시면 연락하시라. 언제든 ‘체험 삶의 현장’을 해드릴 수 있으니까. 물론 일당은 없고, 참가비를 내셔야 한다.
시칠리아의 여름은 식당에서 보면 한철 먹고사는 절호의 시즌이다. 그렇지만, 막 더워질 무렵에는 식당도 뜨뜻미지근하게 손님이 적다. 관광객은 아직 밀려들지 않았고, 시내 사람들은 더워서 나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면 오븐도 축축 늘어지고 ‘성깔대사’ 주방장 주세페 바로네의 성질도 늘어지고, 손님 수도 늘어진다. 게다가 나 같은 졸병 요리사들도 군기가 쏙 빠져 함께 세트메뉴로 늘어진다. 아아, 이럴 때는 바다가 딱인데.
시칠리아에서 바다 타령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널린 게 바다고, 드러누우면 해변이니까.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부주방장 뻬뻬의 50㏄짜리 ‘딸딸이’를 얻어타고 휭하니 달리면 바다다. 사실, 나는 그 시칠리아의 바다를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는 둥실 떠오른 보름달처럼 바다는 묘하게 고향을 생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고향이 바다는 아니다. 다만, 저 바다 수평선 너머에 한국이 있다는 실체적인 존재감이 느껴지는 까닭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언니들’ 때문이었다. 원래 수영복은 두 장이 기본이고, 아니면 아래위로 길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이 동네 여름 바다는 걸핏하면 한 장짜리 짧은 것만 챙긴 언니들이 창궐한다. 남자도 아니고, 분명히 아래위 두 장짜리 수영복을 샀을 텐데 말이다. 뭐, 나야 기혼자이니 제법 뻔뻔한 척 해변을 둘러보며 여유를 부렸지만 부주방장 뻬뻬는 얼굴이 벌게져서 괜히 킁킁, 헛기침만 해댔다.
뻬뻬는 참 독특한 데가 있는 친구였다. 십대 후반에 이탈리아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가 하면 타고난(?) 대마초꾼이어서 주방장의 골칫덩어리이기도 했다. 게다가 공산당원이었다. 그렇다고 매일 공산당선언을 외우거나 지하동굴에서 비밀회합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좌파 밴드의 낡은 테이프를 수없이 돌려 들으며 흥얼거리는 엉뚱한 녀석이었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는 정치 색깔이 분명한 밴드들이 많다. “북부 사람들한테 세금 뜯어다가 남부 사람들 먹여살리는 로마 중앙정부는 자폭하라”고 주장하는 극우파 밴드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뻬뻬가 사모하는 밴드는 좌파였는데, 가죽점퍼에 가죽바지, 치렁치렁한 파마머리를 늘어뜨리고 쿵짝 쿵짜작, 연주를 멋들어지게 했다. 아, 물론 가사는 매우 정치적이어서 이게 노랫말이 되나 싶은 것도 많았다. ‘엎어버려 저 자본가들 우리 돈은 어디 간 거야 하루종일 일해도 수중에 한푼도 없다네.’
하기야 노래가 어디 사랑 타령만 있더냐. 일찍이 이탈리아는 정치적인 성격이 분명한 노래들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파시스트를 찬양하거나 반대로 공격하는 노래들이 널리 불렸고, 유럽 68세대들의 행진곡처럼 불렸던 ‘코만단테 체 게바라’(체 게바라 장군)도 바로 이탈리아에서 널리 사랑받던 노래였다.
펄펄 끓는 도가니탕 같은 주방을 벗어나 바닷가에 몸을 담그면 어쨌든 시름은 잊을 수 있었다. 주방장 주세페는 이 대목에서도 요리사 티를 냈다. 갯바위 틈을 뒤져서 게를 한 움큼 잡아냈다. 이걸 올리브유에 살살 볶고 파슬리 한 줌과 바질을 넣어 파스타를 볶아 요기를 했다. 아, 바다 냄새!
해초들을 뽑았다, 주웠다. 모았다, 끓였다
그러나 정작 나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해초들이 좋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해초를 먹지 않는다. 미역, 김, 우뭇가사리, 톳 … 수없이 많은 이름이 있는 한국과 달리 이 나라에선 그냥 ‘해초’로 통일됐다. 따로 학명이나 전문 이름이야 있겠지만 먹는 재료가 아니니 시중에서는 이름 분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해초. 미역도 해초고 김도 해초였다. 그 말에는 ‘먹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바닷가 출신이 아니어서 종류를 구분할 수는 없으니 내게도 그냥 해초였다. 그러나 난 그걸 먹는다는 점이 달랐다. 게다가 자연산 아닌가. 나는 갈색과 자주색, 청색의 해초를 대충 한 다발 챙겼다. 챙겼다? 참 적당한 말이 없다. 뽑았다, 주웠다. 건졌다, 모았다, 수집했다, 뭐든 적당한 낱말이 없는 행위였다. 그냥 바다가 주는 거니까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 미역(이라고 추정되는 해초)을 마늘, 바지락과 함께 올리브유에 볶아서 미역국을 끓였다. ‘시칠리아 최초의 한국인 요리사, 미역국을 끓이다’였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엄마! 이럴 땐 엄마가 그리운 법이다. 조선간장을 살짝 넣고 달달 볶은 쇠고기에 뽀얗게 국물이 우러나는 기장미역으로 끓여낸 내 어린 시절의 생일상이 떠올랐다.
미역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유럽에서 한식당을 제대로 하면 그야말로 ‘터질’ 가능성이 짙다. 먹고살 만한 유럽 사람들은 새로운 음식에 늘 마음이 열려 있다. 한식을 아주 전통적으로 해석해서 제대로 한 상 차려내는 것도 좋겠고, 기왕이면 서양식 식탁 차림을 이용해서 깔끔하게 풀어내는 것도 좋은 반응이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공수한 김으로 김밥을 말아 주세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대접했더니 몹시 놀라워했다. 그렇지만, 그 이유는 좀 실망스러웠다.
김밥을 난감하게 한 ‘노리마키’의 공습
“한국인도 ‘노리마키’를 먹나 보지?” 한식당이 없는 시칠리아에서 선수를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초밥 열풍이 불면서 ‘노리마키’(김말이·김밥)가 떡하니, 팔레르모(시칠리아의 주도)에도 등장한 것이다. 김밥도 아니고 노리마키라니, 쳇.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이탈리아 요리 선생이 등장하여 털이 숭숭한 팔로 앙증맞은 김밥, 아니 노리마키를 말았다. 이미 대중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가히 ‘스시 가미카제’의 유럽 공습이었다.
본격적인 시즌이 돌아오기 전에 부지런히 먹으며 나는 체력을 비축했다. 주방장 주세페는 슬슬 빈둥거리는 요리사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도축을 앞둔 소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흐흐, 푹 쉬라구. 여름에 한번 제대로 붙어 봐야지, 안 그래?
역시나, 예약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카운터의 웨이터는 아예 전화기를 끼고 살았고, 주방장은 재료를 작은 트럭으로 실어 날랐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여름은 떡이 된 거였다. 열여섯 시간은 기본적으로 일해야 했다. 그동안 바다는 점점 뜨거워졌다. 오븐도, 파스타가 펄펄 삶아지고 있는 솥도 뜨거워졌다. 나도 열통이 터지듯 후끈 달아올랐다. 물론 아쉽게도 바닷가의 토플리스 여인들 때문이 아니었다. 순전히 쏟아지는 전표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논나’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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