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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독서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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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이다혜의 한 줄로 한 권 읽기
〈청년을 위한 독서클럽〉피에르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노블마인 펴냄 “나는 여자야. 여자한테 육체 빼면 뭐가 남아?” 내 여중시절은 88올림픽 이후 폭발한 대중문화의 ‘맛’을 탐닉할 때였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이 내한공연을 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고, <더티댄싱>과 <영웅본색> 같은 비디오는 일용할 간식이 되어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그리고 우리는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또래 남자 아이들은 발육이 늦어 고등학생은 되어야 쓸 만해졌기 때문에 학교와 학원의 젊은 남자 선생들이 특별히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2학년 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반 앞에 1학년 여자 애들이 들끓었다. 나와 같은 반 친구가 “멋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1학년들이 손에 우유, 빵, 초콜릿 등을 들고 와서 서성이기 시작한 것이다. 관악산 돗자리 위에서 처녀를 잃고 계곡물에 피를 씻어냈다는, 삼남매 모두 일진이었던 내 짝은 “내가 괜찮은 오빠들 많이 아는데” 같은 소리를 지껄여 소녀떼를 쫓아버리곤 했지만 쉬는 시간만 되면 북새통을 이루는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그동안 주목의 대상이 된 친구는 뭘 했느냐? 아무것도 안 했다. 창밖을 내다보거나, 책을 보거나, 그냥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청년을 위한 독서클럽>의 첫번째 이야기 ‘가라스마 베니코 연애사건’을 읽으며 소름 끼쳤던 이유는, 그때 내가 겪은 상황과 책 속 상황이 너무 똑같아서였다. 소녀떼가 그 친구를 좋아한 이유는, 그 아이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을 때까지 털이 자라지 않을 매끈한 턱, 덜 자란 가슴. 남녀가 손을 잡고 자면 임신한다고 믿던 소녀들에게 ‘정신적’인, 그래서 안전한 사랑은 유혹적이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학교 운동회 때, 내 친구는 소녀떼의 소원대로 바바리코트를 입고 이쑤시개를 물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퍼레이드를 했다. 한참 뒤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만난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여성스러운 차림이었다. 화장을 지우면 여전히 미소년 같은 얼굴이었지만 짧은 스커트 차림이라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전혀 소년 같지 않았다. 안전한 육체에 머물러서는 남자들의 인기를 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헤어지면서 그 친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 가슴이 더 커야 하는데 말이지.”
이다혜 좌충우돌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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